[금요칼럼] 나는 방짜다
[금요칼럼] 나는 방짜다
  • 신아일보
  • 승인 2023.11.03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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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글씨연구소 황성일 대표

‘인사동시대’를 연 신아일보가 창간 20주년을 맞아 ‘문화+산업’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칼럼을 기획했습니다. 매일 접하는 정치‧경제 이슈 주제에서 탈피, ‘문화콘텐츠’와 ‘경제산업’의 융합을 통한 유익하고도 혁신적인 칼럼 필진으로 구성했습니다.
새로운 필진들은 △전통과 현대문화 산업융합 △K-문화와 패션 산업융합 △복합전시와 경제 산업융합 △노무와 고용 산업융합 △작가의 예술과 산업융합 △글로벌 환경 산업융합 등을 주제로 매주 금요일 인사동에 등단합니다. 이외 △푸드테크 △벤처혁신 △여성기업이란 관심 주제로 양념이 버무려질 예정입니다.
한주가 마무리 되는 매주 금요일, 인사동을 걸으며 ‘문화와 산책하는’ 느낌으로 신아일보 ‘금요칼럼’를 만나보겠습니다./ <편집자 주>

 

 

나의 호(號)는 방짜다. 어려서 서예 선생님께서 지어주신 청강(靑江)이라는 한자 호도 있다. 선생님의 호(靑松)와 선생님의 선생님의 호(東江)에서 한 글자씩 따서 나에게 내려 주셨다.

캘리그라피를 시작하면서 스스로 호를 만들어 마음속 다짐을 굳건히 하고자 했다. ‘방짜’는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방짜다. 동전(銅錢)에 들어가는 구리(銅, Cu)와 말레이시아 로얄 셀랑고르(Royal Selangor) 주석 잔이 생각나는 그 주석(Sn)이 78:22의 비율로 만나 만들어진 놋쇠라 불리는 합금(청동)을 일컫는다. 주석의 양이 많아지면 깨지기 쉬워 생활 유기를 만들 때 10% 이내로 함량을 조절하는 데 반해 무려 22%가 들어감에도 깨지지 않는 방짜의 비밀을 전문가들은 거듭되는 망치질과 반복되는 열처리에 있다고 보고 있다.

캘리그라피(Calligraphy)는 말 그대로 아름다운 글씨를 의미하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캘리그라피는 서예를 포함한 먹글씨(78%)를 근간으로 디자인적 요소(22%)가 가미돼 새롭게 태어나는 방짜가 되길 바라서다.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공학도(工學徒)였던 나로서는 어쩌면 무모한 도전과 실패를 경험하며 귀중한 자산을 하나씩 모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首印(수인, 두인 이라고도 부르며 작품의 시작에 낙관하는 인장)에 새긴 ‘칠팔이이(7822)’라는 글자도 그 마음에서 비롯됐다.

한글서예라고 하면 궁에서 쓰던 궁체나 정음체라고도 불리는 판본체를 떠올리겠지만 백성들의 글씨인 민체라는 것이 있었으니 인쇄가 일반화되기 전 홍길동전이나 춘향전과 같은 소설의 필사에서, 또는 은밀한 연애편지에서 볼 수 있었던 참 멋스러운 글씨가 그것이다. 궁체나 판본체에서는 볼 수 없었던 비정형적이고 개성 가득한 글씨를 보면 아마도 그 시절 돈푼깨나 있는 양반집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던 ‘인싸’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큰 무리는 아닐 듯싶다. 서예를 기본으로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디자인으로 승화시킨 글씨, 나는 그것을 하고 싶었나 보다.

90년대 말 용산전자상가에서 솔찬한(당시로서는 상당한)  값을 치르며 데려온 디지털카메라가 있었다. 인화하지 않아도 되니 마음껏 찍을 수 있고 마음에 들지 않은 사진은 과감히 버릴 수 있어 좋았다. 이 물건의 가장 큰 용도는 길거리 노포의 간판을 촬영하는 일이었다. 한국에도 없지는 않았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 보았던 노포의 손글씨 간판에서 느껴지는 그것이 조금 더 세련됐다고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상품명이 대부분 인쇄체였던 국내와 달리 일본의 마켓을 가보면 고급스러운 손글씨로 디자인된 상품이 많았고 내 눈에는 참 멋져 보였다. 언젠가 우리나라도 그렇게 될 날이 올 것을 예견했던 것처럼 설렜었다. 일본에 가면 제일 먼저 찾는 곳이 시장과 문방구였고 예쁜 글씨가 있는 절임류나 장류를 사서 집에 두고 보았었다.

문방구에 들러서는 각종 기념일을 축하하는 질 좋은 종이로 만든 봉투에 쓰인 멋진 손글씨가 마음을 끌었다. 이젠 명절을 앞둔 백화점의 선물 포장이 아니더라도 멋진 글씨가 가까이에 자리하고 있고 세칭 ‘맛집’이라는 곳을 보면 오래된 주인장의 손글씨나 어느 손글씨 장인의 글씨를 쉽게 만날 수가 있다. 

글씨 또한 다른 예술처럼 대중의 눈높이가 차근차근 올라간다. 달달하면 맛있어했던 포도주를 서서히 멀리하고 묵직하고 드라이한 와인에 눈을 돌리고, 믹스커피에 탄복했을 때와는 다르게 근래의 많은 커피 애호가들은 로스팅은 어떻고, 산미가 어떻고 해가며 모두가 바리스타가 다 된 것처럼 말한다. 연극의 삼요소를 희곡, 배우, 관객이라고 학창시절 달달 외웠을 때와는 다르게 이제는 관객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예술가가 대중의 눈높이보다 한참을 앞서가지 못한다면 아마도 본인이 제일 먼저 자괴감에 빠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 황성일 먹글씨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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