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LH의 비겁한 혁신…전관 봉쇄 대책
[데스크 칼럼] LH의 비겁한 혁신…전관 봉쇄 대책
  • 천동환 건설부동산부장
  • 승인 2024.01.22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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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있다고 가정해 보자. A는 대학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기술을 익혀 사회에 나왔다. 전공을 살려 취직하고 실무 경험도 쌓았다. 그리곤 회사에서 나와 창업했다. 교육 관련 신기술을 개발했고 효과를 인정받아 여러 대학에 공급했다. 그러나 정작 A의 모교에선 기술을 설명할 기회도 얻지 못했다. A가 그 학교 졸업생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A는 모교뿐만 아니라 동문이 경영자로 있는 기관에도 기술을 공급할 수 없다. 학연을 이용한 유착 사건이 사회적 문제가 되자 정부가 특별 조치를 했기 때문이다.

다소 과한 설정인 것 같지만 완전히 불가능한 설정도 아니다. 정책 입안자의 판단에 달렸을 뿐이다. LH(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LH는 부실시공을 근절하고 공공주택 품질을 높인다며 '건설혁신방안'을 발표했다. 기술책임, 품질관리, 건설풍토, 인적자원, 디지털전환 5개 분야를 혁신한다고 한다. 좋다. 혁신은 언제나 환영이다. 특히 국민 주거 안정을 목표로 일하는 LH는 혁신을 거듭해 점점 더 나은 공공기관이 돼야 한다.

그런데 혁신 과제 중 '이게 맞나?' 싶은 게 하나 있다. 'LH 퇴직자 소속 업체에 용역 심사 최대 감점을 부여한다'는 과제다. LH 퇴직자가 소속된 업체의 LH 건설 사업 수주를 원천 차단한다는 취지다.

발단은 지난해 발생한 LH 아파트 철근 누락 사태다. LH 아파트의 총체적 부실이 도마 위에 올려졌고 LH 퇴직자들이 몸담은 이른바 '전관 업체'들이 부실의 원흉으로 지목됐다.

'전관 원천 차단'이라는 말. 언뜻 보면 과감한 결정인 것 같고 근본적인 문제 해결 대책인 것 같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생각하면 참으로 1차원적인 방안이다.

LH 출신이라는 이유로 LH 사업에 철벽을 치는 건 청렴과 공정이라는 수준을 넘어선 조처다. LH는 이 과제에 '원 스트라이크 아웃'이라는 개념을 적용했는데 이건 원 스트라이크 아웃도 아니고 그냥 '노 스트라이크 아웃'이다. 억지로 끼워 맞추면 LH 출신이라는 게 원 스트라이크라는 건데 누군가에겐 너무 억울하고 역차별적인 규제일 수 있다. 

LH 아파트 부실의 근본 원인이 무엇인가? 전관의 존재 자체인가? 전관이 LH 사업에 참여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LH 시스템 문제다. 전관이 아니라 전관 할아버지와 일해도 시스템이 정상 작동하면 된다. LH는 이해충돌방지제도를 운영 중이고 지속가능경영규정도 가지고 있다. 기존 제도와 규정만 제대로 지켜도 전관 유착 문제는 막을 수 있다.

국토부와 LH는 전관이 LH 사업을 상대적으로 많이 수주한다는 통계를 전관 유착 근거로 내놨지만 이걸로는 전관 자체를 차단할 명분이 안 된다. 실제 누가 누구와 어떤 식으로 부정 유착했는지 철저히 조사해 당사자를 처벌하고 제재할 일이다. 나무를 손질하다 손톱 밑에 가시가 박히면 가시를 빼내면 된다. 나무를 내다 버리거나 아픈 손가락을 자를 순 없다.

우리 머릿속에는 전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항상 부정적인 면이 강조됐다. 전관이 가진 경험과 노하우를 긍정적으로 활용할 생각은 잘 못 한다. 우리가 어떤 시각으로 접근하냐에 따라 전관은 충분히 존경받고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존재다. 입으로는 100세 시대를 얘기하면서 퇴직자들의 경험치를 사장하는 제도를 아무렇지 않게 만들고 '혁신'이란 이름을 붙인다. 진짜 문제가 뭐든 일단 논란을 잠재우고픈 정책 결정자들의 단순하고 비겁한 생각이 득보다 실(失)을 키우는 거다.

혁신(革新)은 묵은 풍속이나 관습, 조직, 방법 따위를 완전히 바꾸어서 새롭게 한다는 뜻이다. 전관을 원천 봉쇄하는 게 혁신인가? 무엇이 새로운가? 전관이 사회적으로 이로운 역할을 하게 만드는 게 혁신이다. 이것이야말로 어렵지만 새로운 접근이고 꼭 필요한 혁신이다.

cdh4508@shina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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