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네가 먹었는데 어찌 내 배가 부르단 말인가?
자네가 먹었는데 어찌 내 배가 부르단 말인가?
  • 황미숙
  • 승인 2012.12.03 14: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6. 고려의 승려,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지눌(知訥)
보조(普照;1158∼1210)국사는 고려 중기의 고승이다.

지눌(知訥)의 속성은 정씨이고 호는 목우자(牧牛子)이다.

불일보조국사는 입멸 후 희종으로부터 받은 시호이다.

보조 국사에게는 누님이 있었다.

보조 국사가 누님에게 항상 염불을 하라고 할 때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부처님같이 훌륭한 아우가 있는데 염불 공부를 해서 무엇 하나. 설사 내가 도를 닦지 않는다 해도 다른 사람까지 제도해 주는 아우가 있는데 나 하나쯤 좋은 곳으로 제도해 주지 않으려나?” 보조 국사는 어느 날 누님이 절에 오는 것을 미리 알고 국사는 혼자서 음식을 맛있게 들고는 상을 물렸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보조 국사의 누님은 섭섭하고 노여운 감정이 일었다.

“누님, 제가 이렇게 배가 부르도록 먹었는데 누님은 왜 배가 아니 부르십니까?” “자네가 먹었는데 어찌 내 배가 부르단 말인가?” “제가 도를 깨치면 누님도 제도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동생이 배부르면 누님도 배가 불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음식을 먹어도 누님이 배부르지 않듯이 내 마음으로 염불을 하면 나의 영혼은 극락에 가도 누님은 갈 수 없습니다.

누님이 극락에 가고 싶으면 누님의 마음으로 염불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죽음도 대신하지 못하는 것처럼 극락도 대리 극락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 이 말을 마치고 보조 국사는 상좌를 시켜 누님의 점심상을 차려 오게 해놓고 말했다.

“누님, 이 동생이 제도할 것을 믿지 말고 당신 자신의 지극정성으로 염불을 하시오. 내생에 극락으로 가도록 하십시오.” 이후로 보조 국사의 누님은 지성으로 염불을 하며 수행하였다고 한다.

지눌은 8세 때 출가했으나 이후 일정한 스승을 따르지 않고 배움에 정진했다.

1182년(명종 12) 25세에 승선에 합격하였다.

당시 승선은 승려의 과거제도로 그의 합격은 출세의 관문이기도 하였다.

지눌은 서울인 개경을 떠나 깨침을 향한 정진에 몰두한다.

수행과 탐구를 통한 체험과 확신을 바탕으로 명종 20년(33세)에는 팔공산 거조사로 옮겨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실천에 옮겼다.

이는 당시의 불교를 일선하려는 큰 혁신운동이었다.

당시의 불교계는 지눌보다 100여년 앞서 살았던 대각국사 의천의 화해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교간의 대립이 여전하였다.

지눌이 활약한 시기는 무신난이 일어나 정치세력이 무신들로 교체되면서 불교교단도 재편되던 때였다.

종래 중앙의 정치세력과 밀착되어 있던 개경 중심의 중앙불교는 종파를 막론하고 거의가 몰락했으며, 새로이 지방에서 결사운동이 대두하여 불교계를 주도하기 시작했다.

지눌은 기성불교교단의 모순, 즉 정치세력과 지나치게 밀착함으로써 야기된 폐단과 선종과 교종 간의 극단적인 대립상을 비판하며 불교개혁을 추진했다.

그중에서도 침체된 선을 부흥시키면서 불교계를 개혁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수선사였다.

지눌은 인간의 심성에 대한 철학적인 분석을 토대로 실천체계로서 3문(三門)을 제시했다.

첫째, 돈오점수설(頓悟漸修說 : 先悟後修)에 입각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했다.

둘째, 화엄과 선이 근본에 있어서 둘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셋째, 수행의 최종적인 단계로서 송나라의 임제종 승려 대혜종고(大慧宗杲)의 간화선(看話禪)에 영향을 받았다.

지눌이 궁극적으로 표방한 것은 간화선이었다.

그러나 간화선에 철학적인 기초를 부여한 것은 중국 간화선과 다른 지눌의 독창이었으며, 종래 대립관계에 있던 선과 교를 이론적으로 일치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불교사상의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불일보조국사비명>에 의하면, 그는 타계하던 날 송광사 안의 대중을 법당에 모이게 하였다.

그리고는 제자들과 일문일답으로 자상하게 진리에 대한 대담을 하였다.

“이 눈은 조상으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고, 이 코도 이 혀도 그렇다.

이제 이 산승의 목숨을 대중에게 맡기니, 찢든지 자르든지 마음대로 하라.” 그리고 지눌은 “일체의 모든 진리가 이 가운데 있느니라”하고는 법상에 앉은 채 열반에 들었다.

이때가 1210년 그의 나이 53세였다.

진리는 정해진 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 것도 없고 법을 운운할 것도 없고, 또는 굳이 아니라고 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진리 앞에서는 부처나 중생이나, 왕후장상이나 백정이나, 사장이나 사원이나, 개나 고양이나 다 평등하다고 하겠다.

법 앞에서의 평등이 민주주의란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진리라는 사실을 언제쯤이면 깨달을 수 있다는 겐지. 산문너머에 있지 않아서인가? 아니면 이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있어서 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