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YS 서거> 금융실명제 경제개혁…OECD 숙원 이뤄
< YS 서거> 금융실명제 경제개혁…OECD 숙원 이뤄
  • 온라인뉴스팀
  • 승인 2015.11.22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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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 말 대기업 연쇄 도산 등 위기 관리 실패로 IMF 사태 초래

▲ 22일 새벽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 문정수 김영삼 민주센터 상임이사(가운데)등이 김 전 대통령의 영정사진을 들고 빈소로 향하고 있다. ⓒ연합뉴스
만 25세의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9선의 역대 최다선 국회의원으로 문민정부 시대를 연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의 공과(功過)는 경제정책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김영삼 정부는 금융 실명제와 부동산 실명거래 등 경제개혁 정책을 펴고, 대외적으로는 적극적 시장개방을 시도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그러나 임기 말 한보철강과 기아자동차 등 대기업의 연이은 도산 등 곳곳에서 켜진 '경제 적신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사태를 맞기도 했다.

◇ 부패 차단·과세형평성 확보…OECD 가입

김 전 대통령은 "변화와 개혁으로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로 경제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

이런 의지를 바탕으로 금융·부동산의 양대 실명제를 이룩해 우리 경제의 투명성을 높였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92년 12월 대선을 앞두고 부산 사직운동장에서 열린 대규모 군중 유세에서 인사하는 모습. ⓒ연합뉴스
김영삼 정부는 집권 초기 80%가 넘는 높은 지지율을 업고 금융·부동산 실명제를 도입하며 부패 차단과 과세 형평성 확보에 팔을 걷어붙였다.

금융실명제는 김 전 대통령의 취임 첫해인 1993년 8월 12일 '대통령긴급재정경제명령 16'호 발동을 통해 전격 시행했다.

가명과 차명을 쓴 금융거래가 각종 비리·부패 사건의 원인이라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되던 차였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담화문에서 "금융실명제를 실시하지 않고는 이 땅의 부정부패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없고, 정치와 경제의 검은 유착을 근원적으로 단절할 수 없다"고 실시 배경을 설명했다.

김영삼 정부의 경제개혁 정책은 부동산 거래 실명제로 이어졌다.

금융실명제법 도입으로 부동산에 자금이 쏠릴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자 투기를 막으려고 1995년 1월 6일 부동산 실명제 실시 계획이 발표됐다. 입법 절차는 3주 만에 신속하게 이뤄졌다.

김영삼 정부는 한국의 경제 규모가 확대되고 산업구조가 고도화되면서 정부의 규제가 민간부문의 발목을 잡는다는 인식으로 규제개혁에도 나섰다. 기업창업·공장입지, 자금조달, 시장진입 관련 행정 절차가 크게 간소화됐다.

대외적으로는 임기 전반기 빠른 경제 성장과 적극적 시장개방을 바탕으로 1996년 12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점도 업적으로 꼽힌다.

정부 차원에서 OECD 가입을 역점 사업으로 정하고 가입 협상을 벌여 성사시킨 일이었다.

당시 야당에선 OECD 가입에 따른 외화출자와 개도국 지원 등 의무 사항이 많은 점을 들어 '시기상조'라는 지적이 나왔으나 국민들의 자부심은 한껏 높아졌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사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 급속한 세계화와 시장개방…자본유출입 허용으로 외환위기

OECD 가입은 불과 1년 만에 부메랑으로 다가왔다.

김영삼 정부는 OECD 가입을 계기로 경제개혁·개방 정책에 피치를 올렸지만 1997년 1월 재계 14위인 한보그룹 계열사인 한보철강 부도를 계기로 대기업 연쇄 부도 사태를 맞았다.

같은 해 4월 삼미그룹이 부도를 낸 데 이어 7월 기아자동차 도산 사태가 터졌다. 쌍방울그룹, 해태그룹이 위기를 맞았고 고려증권, 한라그룹이 차례로 쓰러졌다.

1997년 한 해 동안 부도를 낸 대기업의 금융권 여신만 30조원을 훌쩍 넘어서면서 나타난 신용 경색과 금융시장 혼란은 한국을 금융위기로 몰아갔다.

해외 금융기관의 부채 상환 요구에 외환보유액이 바닥이 나자 김영삼 정부는 1997년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해 모라토리엄(대외채무 지불유예) 선언을 가까스로 면했다.

▲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새벽 서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0시21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중환자실에서 혈액감염 의심 증세로 치료를 받던 중 숨을 거뒀다고 이 병원 관계자가 전했다. 사진은 1993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취임식 후 카퍼레이드를 하는 모습. ⓒ연합뉴스
OECD 가입으로 예상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충분한 사전 준비를 하지 못하면서 급속하게 시장개방과 자본 유출입을 허용해 IMF 구제금융 사태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당시 김 전 대통령은 "국정 최고책임자로서 참으로 송구스러울 뿐"이라며 난국 타개에 힘을 합쳐달라고 국민에게 호소했다.

재임 5년간 경제부총리를 6번이나 바꿔 일관성 있는 경제정책이 수립·집행되지 못했고, 무리하게 시장개방 정책을 추진하다가 외환위기를 맞은 점은 김 전 대통령의 과(過)로 지적된다.

[신아일보] 온라인뉴스팀 webmaster@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