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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4형제가 초기 천주교의 밀알역할
소백산맥 연풍지역은 '천주쟁이'들의 은신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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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장환 취재국장
  • 승인 2014.04.29 15:3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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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18C 조선사회와 신해박해

 
이승훈, 이벽에 세례주고 복음 시작…한국 교회의 출발점
1791년 신해박해 일어나…윤지충, 제사 거부하다 끝내 순교

[글=주장환 취재국장] 18세기 후반으로 접어들자 조선은 화폐유통이 활발해지면서 상업이 급속히 발전한다. 이는 빈부격차를 가져왔다. 빈농과 부농이 생기며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땅을 잃은 빈농은 먹고 살 길이 없어 부농의 소작농이나 산 속으로 들어가 화전민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또 헛기침하면서 곰방대만 두드리는 양반들보다 장사로 부를 축적한 평민들이 득세하면서 신분제가 요동치는 요인으로 부상한다. 이같은 분위기에 따라 평민들의 생각도 보다 근대적으로 변해간다. 여기에 성리학을 곰팡내 난다며 투덜대던 실학자들의 실학사상이 맞장구를 쳐댔다.

가만 들여다보면 실학사상은 기가 막히게 시대조류와 맞아 떨어졌다. 실학은 주희가 스탠다드인 유교 경전 해석에 염장을 지르면서 새로운 사상체계 즉, 공맹 단계의 원초유학(原初儒學)으로 돌아가고자 했다. 이들은 공맹사상을 마르고 닳도록 파고든 끝에 하늘(天)이나 상제(上帝)에 대한 관념이 있다는 사실을 찾아내곤 쾌재를 불렀다.

■ '보유론' 남인 사상의 화수분 역할

특히 맹자의 민권사상은 천주교 사상과도 연관이 있다며 기존 해석에 덧장을 댔다. 공자는 군주는 민중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정치를 해야 하며,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한 다음, 도덕교육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남인계 지식인들은 중국으로 눈을 돌렸다.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서적은 그때까지 숨가쁘게 전개된 세계사를 이해하는데 큰 힘이 됐다. 중국의 일부 학자들도 원초유학에 줄기를 대고 보유론(補儒論)을 주장했다. 이는 천주교 신앙이 유교의 부족한 점을 보강해 준다는 논리다. 이런 논리는 남인들에게 사상의 화수분 역할을 했다.

조선왕조는 불평등 신분제 사회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질서가 급속히 무너져 가고 있었다. 이는 이미 1559년부터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중심으로 관아를 습격하고 관리를 살해하는 한편 창고를 털고 빈민에게 양곡을 나누어 주었던 임꺽정 때부터 발아해 왔다.

18세기에 이르자 신분제도는 장마에 토담흙 무너지듯 무너져 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인간 차별없는 평등 사회’를 기다렸다. 이때 하느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주장은 희망없는 사회에서 저절로 퍼지는 들불과도 같았다.

예수를 목자 삼아 하느님의 말씀을 전 인류에게 심어주고자 했던 가톨릭은 신대륙과 동양 선교에 진력했다. 특히 예수회를 중심으로 한 선교 단체들은 일본과 중국에 발을 디뎠으며 임진왜란(1592~1598년)으로 조선도 씨알만큼 영향을 받았다.

17세기 이후 중국 진출 선교사들은 다양한 천주교 서적들을 한문으로 펴냈고(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 판토아의 ‘칠극(七克)’등), 이 책들이 조선에 전래되면서 새로운 사상에 목말라하던 조선사회 지식인들의 목을 촉촉이 적셔 주었다.

▲ 천주실의. 가톨릭사상과 스콜라철학을 겸비한 서양학자인 마테오리치가 중국학자와 토론하는 내용이다.

조선에서도 백성과 국가에 이로운 새로운 학문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다진 일부 실학자들은 18세기에 들어와 천주교 서적을 세계사의 큰 물줄기로 평가하게 됐다. 이들 선각 지식인들은 중국에 전파된 천주교를 통하여 또한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 천주교서를 읽고 스스로 깨우쳐 나간다.

그러나 실학자들이라고해서 모두 다 천주교를 옹호하고 이해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사고는 여전히 성리학에 기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창설 직후부터 민중 종교 운동의 특성을 드러내었던 천주교는 조선사회에 이식되는 과정에서 된서리를 맞는다. 앞서 언급한 보유론적 시선으로 부드럽게 받아들이려는 측(여기엔 과학·기술적 측면만을 수용하려는 측도 포함)과 천주교 사상의 유입이 사회적 이질감을 가져오고 혼란을 부추길 것이라는 척사론적(斥邪論的) 시선으로 갈라지면서 길고도 질긴 박해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프랑스 신부들의 엄격하고 절제된 종교적 엄숙주의 신앙형태가 불을 지른 측면도 없지 않았으며 천주교를 반(反)유교적 신앙으로 이해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 몫했다. 그러므로 천주교는 유학의 한 갈래이던 실학사상보다는 당시 사회 변동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면서 확산되어 갔다. 사실 천주교 신앙은 당시 조선 사회가 직면해 있던 제(諸) 현상과 더불어 민중들에 의해 들불처럼 서서히 번져가는 독특한 특성을 드러냈다.

조선 왕조에 한문 천주교 서적이 전래된 이후, 18세기 후반기에 이르러서는 천주교 신앙을 실천해 보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이 가운데 대표적 인물은 홍유한이었다. 1770년경 천주교 서적을 읽고 감동한 홍유한은, 천주교 교리서에 나타나 있는 대로 날짜를 7일씩 계산하여 일곱째 날을 주일로 삼아 기도에 전념했다. 그는 금욕 생활과 기도 생활을 실천했을 뿐 아니라, 고기를 먹지 아니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기꺼이 도왔다. 그는 비록 세례를 받지는 못했지만 책을 통해 터득한 천주교 신앙을 홀로 실천해 나갔다.

▲ 경북 봉화군 봉성면 우곡리의 홍유한 유적지. 18세기 후반기 천주교 신앙 실천자 중 대표적 인물로 최초의 수덕자다.

이후로 조선 실학자들 사이에서는 천주교 교리에 대한 깊은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이 연구를 주도하는 사람들은 정치적으로는 기호 남인 계통에 속하고, 학문 전통으로는 성호학파에 속했다.

당시 성호 이익의 학문을 이어받아 연구하던 권철신, 정약전 등 일단의 지식인들은 1777년에 이르러 서울 부근에 있는 주어사(走魚寺)에 모여 공부를 하고 있었다. 주어사에서 이런 모임이 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이벽도 여기에 합류한다.

그들은 주어사에서 유교 경전을 배우면서 중국에서 간행된 각종 서적을 참조했고, 유럽쪽에서 넘어온 서적에 언급된 내용들도 검토했다. 이들이 검토한 서적 가운데는 ‘천주실의’와 ‘칠극’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참여자 가운데 몇몇은 천주교 서적에서 인생에 대한 해답을 얻고 천주교를 신앙으로 삼고자 했다. 이와 같은 결심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자 했던 대표적 인물은 이벽이었다.

■ 주어사에서 '천주실의'등 공부

이벽은 교리를 연구하는 일에만 만족할 수 없어 부연사(赴燕使/조선시대 중국 베이징으로 가던 사신) 일원으로 중국 베이징에 가게 된 이승훈에게 천주교 관련 책들을 구해다 줄 것을 당부했다. 이승훈은 베이징에 간 후 선교사를 만나서 교리를 배우고 베드로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1784년 봄에 귀국했다.

이승훈은 가져온 서적의 일부를 이벽에게 넘겨주었다. 이벽은 몇 개월 동안 이 책들을 깊이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는 이승훈과 함께 친척과 친지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이벽은 정약용 형제들을 찾아가 복음 전파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 덕망이 높은 권일신 등을 입교시키는 한편, 김범우 등 중인(中人)들에게도 전교했다.

1784년 가을 이승훈은 서울의 수표교 부근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이벽에게 세례를 주었다. 여기에서 한국 교회의 출발점이 마련된다. 왜냐하면 교회는 세례를 통하여 결속된 복음 선포 기능을 수행하는 신앙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이 세례를 통해서 우리나라 교회 또는 그리스도교 신앙 공동체가 출발하게 됐다.

교회 창설 직후 복음 선교에 앞장선 인물로는 이승훈, 이벽, 권일신이 있다. 권일신의 제자인 이존창은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복음을 선포하였고, 전주에서는 유항검이 신앙을 전파해 갔다.

그러나 세상만사가 그리 순조롭게 흐르지는 않는다. 1785년 봄, 아마 지금처럼 꽃들이 흐드러졌으리라.

형조 관리들이 서울 명례방 김범우의 집에 들이닥쳐 모임을 갖고 있던 신자들을 검거했다. 그러나 잡고 보니 이들 대부분이 양반인지라 양반은 구금하지 않는다는 법에 따라 방면했다. 그러나 중인 출신인 김범우는 붙잡혀 고문을 받은 후 유배를 떠났으며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 영풍 순교지 형구돌. 구멍에 줄을 넣어 죄수의 목을 옭아맨 다음 반대편에서 줄을 잡아 당겨 죽였다.

이러한 탄압에도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오히려 조직을 더욱 탄탄하게 다져 나갔다. 그리하여 이들은 1786년 가성직 제도(假聖職制度)를 설정하기까지 하였다. 가성직 제도는 성품성사를 받지 아니한 신자들이 성직자의 고유한 업무까지 수행하던 비합법적 제도다. 이 제도는 1789년경까지 계속되었으나 베이징 주교가 가성직 제도와 조상에 대한 제사를 금지시켰으며 선교사를 보내왔다.

조선은 제사의 나라다. 적어도 8촌까지는 제사상에 밥 한 그릇이라도 놓아 추모하는게 자자손손 내려오던 소중한 예식이었다. 조상에 대한 제사는 양반 가문의 사회적 결속과 존립의 기반을 마련해 주었으므로 제사 금지는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사람들에게 풀기 어려운 딜레마였다.

조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일은 지금도 가문 사람들의 눈총을 받는 일이다. 그러므로 천주교 신자에 대해 문중에서 먼저 몽둥이를 들고 나섰다. 나라의 탄압보다 일가친족의 호령이 더 무서운 법이다. 이 과정에서 초기 교회 창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양반신자들이 제 풀에 꺾여 신앙을 버리는 일이 속출했다.

그런데 1791년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신해박해 혹은 진산사건이라 불리는 최초의 박해사건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신라 불교의 들불을 당긴 이차돈의 순교이후 1200여년만이다. 윤지충은 어머니 권씨가 죽자 천주교 교리에 따라 위패를 폐하여 불태우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는 전주감영으로 끌려가 국문을 받았다.

▲ 윤지충 동상. 1791년 순교한 전북 전주시 한옥마을 전동성당에 세워져 있다. 목에 긴 칼을 차고 있는 오른쪽 인물이 윤지충 바오로이며 왼쪽에 서있는 사람은 외사촌으로 함께 참수된 권상연 야고보.

■ 탄압속 교회지도자들 조직 "탄탄"
 

전라도 관찰사 정민시가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호통쳤다. 윤지충은 이렇게 답했다.
“신주가 제 부모라고 믿었다면 왜 불살랐겠는가? 그러나 그 신주에는 제 부모의 어떤 것도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불사른 것이다.”
“네가 맞아 죽어도 그 교를 믿겠느냐?”
“제가 가장 높으신 아버지를 배반한다면 살아서건 죽어서건 어디로 갈수 있겠는가?”

그는 결국 전주 풍남문 밖 형상에서 부모에 대한 불효에다가 나라에 대한 불충 그리고 악덕 죄로 외사촌 권상연과 함께 목이 날아갔다.

▲ 윤지충 순교터. 전주 풍남문 밖 형상에서 한평생을 마감했다.

조선 정계는 이 문제로 세싸움을 시작했으며 노론 벽파의 집요한 공격을 받은 남인은 바람 앞의 촛불로 몰렸다. 앞서 설명했지만 순교자들이 기호 남인 계통에 속하고, 학문 전통으로는 성호학파에 속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정조는 교주로 지목받은 권일신을 유배시키는 것으로 이 사건을 대충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러나 오히려 남인 계통인 채제공을 중심으로 한 신서파와 홍의호·홍낙안 등의 공서파가 대립하여 1801년(순조 1) 신서파가 결정적인 타격을 받을 때까지 10년간의 지루한 싸움을 이어갔다.

박해를 피해 은신처를 찾는 순교자들의 피난처로 일찍부터 신도촌을 형성하고 있던 소백산맥 연풍지역에 숨어살던 추순옥·이윤일·김병숙·김말당·김마루 등도 1801년 붙잡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초기 천주교의 밀알이 됐던 다산 정약용 4형제와 그 집안의 네트워크도 재미있다. 자화상으로 유명한 조선화가 윤선도의 증손자인 윤두서는 다산의 외증조부이다. 즉 다산의 어머니가 윤두서의 손녀인 것이다. 윤지충은 다산의 외사촌이고 한국 최초로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영세를 받은 이승훈은 다산의 매형이다. ‘자산어보’를 쓴 정약전은 다산의 둘째 형이다. 황사영백서로 유명한 황사영은 다산의 큰형인 정약현의 사위이며 이벽은 약현의 처남이다.

이 네트워크가 오늘날 1700만명의 신자(천주교 544만 2996명(2013년 말 기준), 개신교 1129만명(2012년말 기준)를 낳았으니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는 성경의 말씀이 틀리지 않았나 보다.

<다음 회에는 신유박해와 기해박해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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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원 2014-04-30 11:35:16
천주교의 전래는 학교에서 잠깐 배운것 외엔 아는게 없었는데 작가님 덕분에 많은걸 알게 되어 감사 합니다 다음편도 기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