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솔 부는 맑은 바람 머물러 두었다가 후세에 전하리라
솔솔 부는 맑은 바람 머물러 두었다가 후세에 전하리라
  • 황미숙
  • 승인 2013.07.08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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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조선 개국공신 성산백(星山伯), 배극렴(裵克廉)

조선 태조1년(1392) 7월 17일, 이날에 이르러 태조가 마지못해 수창궁(壽昌宮)으로 거둥하게 됐다. 백관(百官)들이 궁문(宮門) 서쪽에서 줄을 지어 영접하니, 태조는 말에서 내려 걸어서 전(殿)으로 들어가 왕위에 오르는데, 어좌를 피하고, 영내에 서서 여러 신하들의 조하(朝賀)를 받았다. 육조의 판서이상의 관원에게 명해 전상(殿上)에 오르게 하고는 이르기를, “내가 수상(首相)이 돼서도 오히려 두려워하는 생각을 가지고 항상 직책을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했는데, 어찌 오늘날 이 일을 볼 것이라 생각했겠는가? 내가 만약 몸만 건강하다면 필마(匹馬)를 타고도 적봉(賊鋒)을 피할 수 있지마는, 마침 지금은 병에 걸려 손·발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경(卿)들은 마땅히 각자가 마음과 힘을 합해 덕이 적은 사람을 보좌하라.”했다. 그리고 이성계는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에서 왕위에 오르다.
배극렴(裵克廉, 1325 ~1392)은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 사람으로 조선왕조를 개창하는데 공을 세운 개국공신이다. 자는 양가(量可), 호는 필암(筆菴) 또는 화금당(畵錦堂)이다.
문하 좌시중 성산백(星山伯) 배극렴이 졸하니, 임금이 3일 동안 조회를 폐하고 7일 동안 소선(素膳)을 하고, 맡은 관원에게 명해 예장하게 했다. 극렴의 본관은 경산(京山)이니, 위위 소윤(衛尉 少尹) 배현보(裵玄甫)의 아들이었다.
성품은 청렴하고 근신하며, 몸가짐은 근실하고 검소했다. 진주·상주 두 주의 목사가 되고, 또 계림 윤(鷄林 尹) ·화령 윤(和寧 尹)이 돼 모두 어진 정치를 했다. 나가서 합포(合浦) 원수(元帥)가 돼 성을 쌓고 해자(垓字)를 파서 유망(流亡)한 사람들을 안집했다. 수비하는 것은 잘했으나 다만 싸워서 이기거나 공격해 취하는 것은 그의 장점이 아니었다.
고려 왕조의 말기에 이르러 임금에게 마음을 돌려 조준 등과 더불어 서로 모의해 임금을 추대하고는, 마침내 수상(首相)이 됐었다. 그러나 배우지 못해 학술이 없어서 임금에게 의견을 아뢴 것이 없었으며, 세자를 세우는 의논에 이르러서도 이에 임금의 뜻에 아첨해 어린 서자를 세울 것을 청하고는 스스로 공으로 삼으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탄식했다. 졸하니 나이 68세였다.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아들이 없었다라고 《태조실록》에서 기록했다.
그의 외조부는 성주 이씨 이천년(李千年)이다. 1376년(고려 우왕2) 진주도원수로서 진주에 침략한 왜적을 물리치는 등 여러 차례 왜적 격파에 공을 세웠다. 이후 1388년 요동출병 때 우군의 조전원수로 우군도통수인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가 위화도회군에 가담했다. 이어 3군도총제부의 중군총제사가 돼 도총제사 이성계의 병권장악에 일익을 담당했다. 조선 개국 공신 중 최고령자로 1392년 우시중으로 조준(趙浚) 등과 모의, 공양왕을 폐하고 옥새를 갖고 이성계의 집으로 찾아가 국왕으로 추대한 그는 개국공신 1등으로 ‘성산백(星山伯)’에 봉해졌으며 문하좌시중(후에 좌의정)이 됐다.
1392년 7월 공양왕(恭讓王)이 이성계의 사제(私第)로 거둥해 술자리를 베풀고 이성계와 더불어 동맹(同盟)하려할 때, 종1품 시중(侍中) 배극렴(裵克廉) 등이 왕대비(王大妃)에게 아뢰었다. “지금 공양왕이 혼암(昏暗)해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社稷)과 백성의 주재자(主宰者)가 될 수 없으니 이를 폐하기를 청합니다.”했다. 이에 마침내 왕대비는 교지(敎旨)를 받들어 공양왕을 폐하기로 일이 이미 결정됐는데 남은(南誾) 등이 교지를 가지고 북천동(北泉洞)의 시좌궁(時坐宮)에 이르러 교지를 선포하니 공양왕이 부복(俯伏)하고 명령을 듣고 말하기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不敏)해 사기(事機)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슬린 일이 없겠습니까?”하면서 마침내 왕위를 물려주고 원주(原州)로 갔다.
선생이 괴산군 불정면 삼방리(三訪里)에 내려와 있을 때 후에 태조가 세 번 찾아왔다고 하는데, 첫 번째 왔을 때는 선생이 외출로 못 만나고, 두 번째 왔을 때는 팔봉산에 가서 만나지 못하고, 세 번째에 방문해서야 낮잠 자는 선생을 만나 솔직한 심정으로 집권계획을 의논했다. 이에 선생은 조준, 정도전 등과 거사를 도모해 이성계를 즉위토록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후 사람들은 이성계가 친히 세 번씩이나 이곳을 찾아 왔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삼방리’라 하고, 그 산의 이름을 ‘어래산(御來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려 공민왕 12년(1363) 진주 목사로 부임한 이듬해 산에서 잣나무를 북쪽 관아에 옮겨 심었다. 진주사람들이 그를 추앙해 이 나무를 시중백(侍中栢)이라 했다고 한다.
그가 죽은 지 48년 뒤인 1440년(조선 세종22)에 그가 심어 놓은 푸른 잣나무를 보고 당시 진주목사인 정이오(鄭以五)는 다음과 같은 ‘시중백시(侍中栢詩)’를 지었다고 전한다. “세속의 상태를 싫도록 보아오기 반백년에, 어려움에도 변하지 않는 재목으로 백성을 구제한 당신이, 관아에 손수 심은 뜻 알겠구나. 솔솔 부는 맑은 바람 머물러 두었다가 후세에 전하리라.”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