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
  • 황미숙
  • 승인 2012.11.12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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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신라의 승려, 원효(元曉)
원효(元曉)의 속성은 설씨(薛氏)이다.

조부는 잉피공(仍皮公) 또는 적대공(赤大公)이라고도 하는데 지금 적대연(赤大淵) 옆에 잉피공의 사당이 있다.

아버지는 담날내말(談捺乃末)이다.

원효는 처음에 압량군(押梁郡)의 남쪽(지금의 장산군 불지촌 북쪽 율곡(栗谷)의 사라수(裟羅樹)밑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서 율곡(栗谷)이 된 연유를 이야기 하고 있다.

옛적에 절을 주관하는 자가 절의 종 한 사람에게 하루 저녁 끼니로 밤 두 알씩을 주었다.

종이 적다고 관청에 호소하자 관리는 괴상히 여겨 그 밤을 가져다가 조사해 보았더니 한 알이 바리 하나에 가득 차므로 도리어 한 알씩만 주라고 판결했다.

이런 이유로 율곡(栗谷)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원효와 관련해서 부산에서는 5만 명의 왜구를 무마시킨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신라 신문왕(神文王681~691) 당시 왜구들은 신라에 쳐들어와서는 약탈을 해 가기 일쑤였다.

게다가 나라 안의 첩자들이 왜구와 내통하여 조금만 허술한 곳이면 쳐들어왔다.

당시 원효는 5만의 군사가 쳐들어 올 것이라는 예견을 하고 있었으며 살생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

이에 원효는 먼저 왜구를 타이르기로 하고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살생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바다 멀리서 새까만 왜구의 배가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원효는 사미승(沙彌僧)에게 “아랫마을에 가서 호리병 다섯 개를 구해 오너라.” 하고는 뒷산의 성안에 가장 높은 바위에 신라 장군기를 꽂았다.

그리고 이내 호리병을 가져 온 사미승에게 또 다른 일을 시켰다.

“아랫마을로 가면 길손 둘을 만날 것이니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 오너라” 사미승은 곧장 아랫마을을 향하여 내려갔다.

그곳에는 왜구 두 명이 서로 나직이 말을 주고받았다.

사미승은 그들이 왜구 병사라는 걸 알아 차렸다.

“우리가 길을 잃었는데 길 좀 물읍시다.

” “예, 어디로 가십니까?” “저기 저 깃발 너머엔 군사들이 있는지요?” “글쎄요... 저는 이 산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잘 모릅니다.

” 그 말을 들은 왜구들이 산 아래로 향하려 할 때였다.

“거기 두 분은 잠시 들렀다 가시오.” 원효가 산 아래로 소리쳤다.

그들은 곧 원효 앞에 나아갔다.

“어디서 오셨습니까?” “기장에서 왔습니다.

” “왜군을 보셨죠?” “아니오. 보지 못 했습니다.

” “너희 자신을 못 봤다고 이 왜놈들” 하며 원효는 호리병 중 두 개의 목에 붓으로 선을 둘렀다.

그러자 그들의 목에 피멍이 둥글게 생기더니 고통을 주었다.

그리고 원효는 나머지 세 개에도 붓으로 선을 그은 후 왜구에게 주면서 “가서 너희 대장에게 알려라. 이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그들은 이내 대장에게로 달려갔다.

이러한 사실을 부하들에게 소상히 전해들은 대장은 분노하여 칼로 그 호리병을 베어버렸다.

그러자 느닷없이 대장의 목이 꺽어지면서 피를 토하고 죽어버리자, 왜구들은 혼비백산해서 곧장 뱃머리를 돌려 본국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오늘날 범어사가 있는 금정산 중턱쯤에 원효가 깃발을 꽂았던 곳이 ‘원효대’라 불리어지고 있다.

원효라는 이름은 첫새벽[始旦]이라는 뜻으로 출가한 뒤 스스로 지었다.

원효는 661년(문무왕 1) 의상과 함께 두 번째 바닷길로 당나라에 가기 위해 당항성으로 가는 도중 비 오는 밤길인지라 어느 땅막[土龕]에서 자게 되었다.

이튿날 아침에 깨어보니 땅막이 아닌 오래된 무덤임을 알았다.

비가 계속 내려 하룻밤을 더 지내다가 귀신의 동티를 만나 심법(心法)을 크게 깨치고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사라지니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을 알았다”라고 생각했다.

“또 무엇을 구하고 어디에 가서 무엇을 배운단 말인가. 신라에 없는 진리가 당에는 있으며, 당에 있는 진리가 신라에는 없겠는가”하여 더 이상 입당 유학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고 곧바로 되돌아와 이후 저술과 대중교화에 몰두했다.

어느 날 원효대사가 동자승을 데리고 저자거리를 지나갔었다.

주막에서 고기 굽는 맛좋은 냄새가 풍겨 나왔다.

원효 스님은 “참 맛 좋겠군” 하면서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뒤 따라가던 동자승이 한참 만에 송구스러운 듯이 “대사님께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하고 물었다.

원효대사는 웃으며 “이놈아, 넌 아직도 그 불고기를 생각하고 있었느냐! 난 주막 앞에 다 버리고 왔는데” 라고 대답했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는 〈화엄경〉의 핵심사상을 이루는 말로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슬프고 짜증나는 일도, 한 생각 돌이키면 편안해 지는 법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면으로 보면, 여전히 세상은 따스하다.

문제는 어느 쪽에 마음을 두는가 하는 점이다.

시끄럽고 말 많은 세상을 보면서 내 마음에 구름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며, 촛불이 조용히 사르기를 기다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