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좌 상징 마오쩌둥 ‘문화대혁명’, 中 새 교과서 ‘큰 실수’로 규정
극좌 상징 마오쩌둥 ‘문화대혁명’, 中 새 교과서 ‘큰 실수’로 규정
  • 이상명 기자
  • 승인 2020.09.07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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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새 역사교과서 “문화대혁명이 심각한 재앙 초래했다” 기술
(사진=문화대혁명)
(사진=문화대혁명)

중국의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해 1인 체제를 구축한 마오쩌둥(모택동·毛澤東)의 문화대혁명은 오랜 시간 중화민족의 정신을 지배하며 중국의 커다란 축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개혁개방을 추진한 후대 지도자(덩샤오핑(鄧小平), 후야오방(胡耀邦) 등의 실용주의자)들은 수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온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잘못된 정책으로 몰아붙이며 부정해 왔다. 

다만 가장 최근 집권한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은 선대 지도자들과 달리 ‘문화대혁명’을 다시 ‘진보’ 운동으로 되살리려는 움직임을 보여 각계가 우려의 시선을 보낸 바 있다.

7일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중국이 올해 새로 도입한 고등학교 국정교과서(역사과목)에 마오쩌둥 전 국가주석이 주도한 ‘문화대혁명’을 “국가적 재앙”이라고 기술해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새 교과서에는 ‘문화대혁명’이 “공산당 지도자들에 의해 잘못 도입됐으며 반(反)혁명 집단에게 이용됐다”고 언급했다. 지난해 역사교과서에는 기술하지 않은 내용이다. 

그동안 중국은 역사교과서에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어떤 의미에서도 혁명 및 사회적 진보가 될 수는 없다” 정도의 표현으로 기술해 왔다. 올해 새 교과서에도 이 같은 내용은 그대로 유지됐다. 

문화혁명을 주도한 마오쩌둥은 극좌파의 상징적 인물로 1966년 극좌 운동의 일환으로 ‘문화대혁명’을 주도했다. 

‘문화대혁명’의 모태는 전근대적 문화와 물질적 자본주의를 타파하고 순수한 사회주의를 추구하자는 취지에서 시작됐다. 

이후 중국의 전통적 유교문화가 붕되되고 계급투쟁으로 확산돼 전국적인 대중운동으로 확대됐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본래 취지는 퇴색된 채 반대파 숙청 및 파벌 간 정쟁 등에 이용되며 무려 170만명 이상의 목숨을 앗아갔다. 마오쩌둥 및 그 지지세력들은 이를 통해 공산당 내부에서 정치적 입지를 넓혀갔으며 점차 ‘문화대혁명’은 권력 투쟁으로 변질됐다. 

이 같은 피의 숙청은 1966년부터 시작돼 마오쩌둥이 사망한 1976년 끝이 났다.  

SCMP는 덩샤오핑, 후야오방 등은 ‘문화대혁명’을 큰 실수로 규정하며 마오쩌둥 정권과 선을 그으려 노력했지만 시진핑 국가주석은 집권 후 이 운동을 다시 진보운동로 격상하려는 움직임을 보여왔다고 지적했다.

한편, 문화대혁명은 1966년 8월8일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마오쩌둥이 ‘프롤레타리아 문화대혁명에 관한 결정안 16개조’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들은 부자와 향락·사치 등을 부르주아, 악질 지주 등으로 규정한 후 공격했고 반대파들을 이 같은 이유로 숙청하며 당을 장악해 갔다. 이후 1970년 마오쩌둥은 1당 1인 지도 체제를 확립했다.  

vietnam1@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