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특집]‘게임 중독’이 질병이라니…일반화의 오류에 빠지다
[창간특집]‘게임 중독’이 질병이라니…일반화의 오류에 빠지다
  • 김현진 기자
  • 승인 2019.06.08 08: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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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게임중독 질병 간주…국내 이르면 2026년 표준 질병·사인 분류
업계 “게임중독 질병 코드화로 인한 게임 시장 위축 규모 2025년 약 5조원 추정”
85개 단체 “질병 등록 국내로의 적용 막아내야”

이(e)스포츠 종주국이라 불리는 한국은 그 명성과 달리 게임을 규제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이 많다. 셧다운제가 일찌감치 자리 잡았고, 입법화되진 않았지만 과거 정부와 정치권 차원에선 ‘게임중독세’ 도입을 추진했다. 특히 최근엔 세계보건기구의 ‘게임중독 질병코드’ 통과를 계기로 게임업계를 옥죄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그러나 게임업계는 더 이상 근거 없는 논리로 국내 산업의 한 축인 게임을 건드려선 안 된다고 반발한다. <편집자주>

최근 세계보건기구(WHO)가 최근 통과시킨 제11차 국제질병표준분류기준(ICD) 개정안을 놓고 게임업계의 반발이 거세지고 있다. 게임업계와 전문가들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WHO 개정안이 국내에 도입될 경우 게임산업 축소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다. 이에 문화체육관광부와 보건복지부는 서로 다른 의견을 내놓으면서 정부부처 간 갈등으로도 번지는 양상이다.

WHO가 지난달 28일 최종 발표한 11차 ICD는 게임중독을 게임사용장애로 분류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는 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우선시해 부정적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게임을 지속하는 행위를 ‘게임중독’으로 규정하고, 치료해야 된다는 게 골자다.

11차 ICD는 오는 2022년부터 발효되며, WHO는 발효 이후 최소 과도기 5년에 걸쳐 각 회원국에 도입을 권고할 예정이다.

◇WHO 권고안 과학적 근거 부족

이를 두고 국내선 문체부와 게임업계 관계자, 전문가들이 ICD 개정안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문체부는 공식 발표를 통해 WHO의 권고안을 국내 도입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또 게임업계도 지난달 28일 ‘WHO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 관련 긴급 토론회를 개최하며 의견을 수렴했고, 다음날 ‘게임질병 코드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출범시켰다.

한국게임산업협회는 지난달 28일 국회 제7간담회장에서 'WHO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관련 긴급 토론회를 개최했다.(사진=신아일보)
한국게임산업협회는 지난달 28일 국회 제7간담회장에서 'WHO 게임이용장애 질병코드'관련 긴급 토론회를 개최했다.(사진=신아일보)

WHO의 개정안에 반대하는 측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입을 모은다.

한국게임산업협회는 성명서를 통해 “의학계나 심리학계에서도 ‘게임 장애’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린 바 없다”며 “WHO의 최근 움직임이 게임 장애와 관련된 과학적 의문을 해소할 수 있는 명확한 데이터에 기반하고 있는지, 우려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다.

또 “게임 장애를 과학적으로 입증하기 위해서는 임상적 실험을 통한 데이터로 이를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한다”며 “대상 그룹을 이루는 구성원이나 해당 그룹의 모집 과정이 타당한지도 검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협회는 “11차 ICD 초안은 게임 장애를 ‘다른 일상생활보다 게임을 우선시해 부정적인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게임을 지속하거나 확대하는 게임 행위의 패턴’이라고 정의한다”며 “WHO가 진단기 준으로 제시한 것은 전 세계 20억명이 즐기는 문화콘텐츠를 ‘질병’으로 분류할 수 있는지 상식적 차원에서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학회에서도 WHO의 결정이 무리수라는 지적이 나온다.

정의준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전 세계에서 주도적으로 질병코드를 만드는 곳은 미국의 APA와 WHO가 있다”며 “2013년 APA에서 DSM 5라는 질병 코드를 등재하는 열람이 나왔는데 게임 과몰입에 대한 기준이나 특정 지표 등에 대해 통일된 기준이 없기 때문에 조금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류했다”고 설명했다.

또 “그 이후 그에 관련한 문제에 관한 연구가 진척됐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며 “DSM 5가 5년이 지난 후 ICD가 나왔는데 충분한 논리적 근거와 문제에 대한 보완이 없이 이뤄졌기 때문에 납득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정의준 교수는 게임을 이용 중인 2000명의 청소년들을 5년 동안 추적조사하고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ICD 개정안 도입 시 게임산업 축소될 것”

게임업계는 ICD 개정안이 국내에 도입될 경우 게임산업이 크게 축소될 것을 우려한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작년 발행한 ‘글로벌 게임산업 트렌드 2018년 연간호’에 따르면 2017년도 글로벌 게임산업 규모는 1349억달러(한화 약 160조6000억원)로, 우리나라는 전 세계 4위 수준인 57억6400만달러(한화 약 6조5000억원)을 기록했다.

반면 지난해 서울대학교 산학협력단이 진행한 연구에선 게임 과몰입 질병 코드화로 인해 국내 게임 시장의 위축 예상규모는 2023년 2조2064억원, 2024년 3조9467억원, 2025년 5조2004억원으로 추정됐다. 여기엔 ‘부정적인 인식’이 자리한다.

한국게임산업협회 관계자는 “우리나라에서 게임은 셧다운제 등 관리하고 통제의 대상”이라며 “WHO의 권고안이 도입된다면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부정적인 인식이 완전히 뿌리를 내리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질병을 유발할 수 있는 요인이 된다면 어느 누가 게임을 하려 하고 게임산업에 종사하고자 하겠는가"라며 "유해한 물질을 생산하는 산업이라는 부정적인 인식이 완전히 자리 잡을 공산이 크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당장은 아니겠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선 게임이 사회 전반에 혐오산업으로 인식될 수 있다"며 "IT 인재들이 게임산업을 기피할 가능성이 높고, 게임 산업 전반의 쇠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의준 교수도 “이번 WHO의 11차 ISD가 보건복지부 주도 하에 한국의 질병코드로 등재된다면 게임 자체는 일상적인 문화가 아니라 마약과 같이 규제해야 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식이 된다”고 말했다.

또 “한국에서는 게임에 대한 인식이 산업과 연관이 많다”며 “청소년 이용자들도 많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PC방이나 게임장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인식적인 면이 상당히 중요한데 이번 WHO 권고안은 근본적으로 게임에 대한 인식이 부정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산업적으로 보면 근본적인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지난 29일 국회 제1세미나에서는 총 85개의 협단체가 참여한 게임질병 코드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출범식이 열렸다.(사진=신아일보)
지난 29일 국회 제1세미나에서는 총 85개의 협단체가 참여한 게임질병 코드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출범식이 열렸다.(사진=신아일보)

이는 지난달 29일 국회에서 진행된 ‘게임 질병 코드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의 출범식이 ‘게임산업의 장례식’이라고 표현된 배경이기도 하다.

당시 출범식에는 53개의 학회·공공기관·협단체와 32개의 대학단체 등 총 85개의 단체가 참여했다.

공대위는 출범식을 개최하면서 “오늘은 게임산업에 대한 장례를 치르는 현장”이라며 “과거의 게임문화를 떠나보내고 새로운 게임문화와 산업으로 다시 태어나는 장이 되도록 진지한 고민과 노력을 다짐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게임중독의 질병분류 문제는 정부 부처간의 갈등으로도 번지는 양상이다.

우선 보건복지부는 WHO의 권고안을 지지하는 입장으로, 지난달 30일 기자회견을 통해 “게임중독은 질병으로 분류될 필요성이 있다”고 말했다.

반면 문체부는 “게임중독 질병 도입에 반대한다”며 “복지부가 주도하는 민관협의체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국무조정실은 민관협의체 구성 등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jhuyk@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