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 오디오에 푹 빠진 아파트 관리소장
아날로그 오디오에 푹 빠진 아파트 관리소장
  • 김상현 기자
  • 승인 2015.02.02 15: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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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산 이경일씨 소장실을 음악감상실로
▲ 오디오 애호가이면서 경북 경산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 소장이기도 한 이경일씨가 빈티지 오디오가 진열된 사무실에서 음악을 들려주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팍팍한 아파트 숲 속에서 추억의 아날로그 문화 공간을 가꿔요.”

사무실에 들어서니 가운데 놓인 책상 주변에 빈티지 오디오 시스템들이 병풍처럼 진을 치고 있다.

안쪽 문을 열고 더 들어가면 마치 오디오 박물관처럼 더 많은 기기가 보인다. 400가구 남짓한 경북 경산의 한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볼 수 있는 진풍경이다.

JBL 하크네스나 4343, 탄노이 3809 등 희귀하고 상태 좋은 외국산 스피커를 비롯해 인켈, 아남전자 등의 과거 국산 제품들, 여러 개의 피셔 진공관 앰프, 턴테이블, 카세트 등 수십 세트의 음향기기들이 이곳에 있다.

기기들의 주인은 이 아파트 관리사무소장 이경일씨(61)다.

1999년 아파트 관리소장이 된 이씨는 그전까지 음악 기기 대리점이나 음악감상실을 운영했었다.

하지만 70년대까지 풍미한 오디오 전성기를 지나 80~90년대에 이르러서는 음악감상실마저 점차 사라지자 그는 새로운 진로를 모색해야 했고 주택관리사가 됐다.

게다가 단독 주택에서 아파트로 이사하면서 애써 모아온 음악 기기들은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했다.

이 소장은 “갈 곳 없는 오디오들을 하나둘씩 관리사무소로 옮기다 보니 지금처럼 됐다”며 멋쩍어했다.

낮에는 그저 관상용처럼 놓여 있을 뿐이지만 업무가 끝나고 나면 이 기기들은 제기능을 발한다.

오디오의 주인은 대중가요부터 재즈, 클래식까지 다양한 음악을 감상하면서 한 기기에 이 스피커 저 스피커 다 물려보며 소리를 만드는 과정을 즐긴다.

저녁이 되면 이곳은 소문을 듣고 찾아온 애호가들이 음악을 매개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고 차를 마시는 문화공간이 되기도 한다.

이 소장은 “이미자가 17세 때 부른 ‘동백 아가씨’를 한번 들려줄까요?”라며 CD를 올리자 특유의 잡음이 있지만 앳된 이미자가 가까이서 노래하는 듯했다.

올린 CD도 그냥 CD가 아니라 절판된 LP에서 내용물을 추출해 제작한 CD 알맹이에, 재킷까지 직접 디자인해 만든 것이다.

울림통이 큰 스피커로 소리를 제대로 즐기면 음악 소리가 바깥까지 새나가지만 주민들은 그러려니 하는 모양.

이 소장은 “어쩌다 음악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면 간혹 항의하는 분들도 있긴 해도 오히려 음악 소리가 끊기면 ‘소장님 무슨 일 있나’라며 궁금해한다”며 “한 아파트 관리소장의 평균 근속연수가 2년인데, 서로 배려하는 마음들이 있으니 지금까지 여기 있는 것 아니겠느냐”며 웃었다.

그는 관리소장으로 일해오는 동안 주민을 위해 아파트 지원 조례 제정과 쓰레기 소각장 건설 반대 운동을 펼쳤고 주택관리사협회의 법률분과위원, 제도개선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그런 활동 못지않게 맘 상한 일이 있는 주민이 관리사무소를 찾았다가 그가 들려준 음악에 위로받고 돌아갈 때에도 적잖이 보람을 느낀다.

이 소장은 “관리사무소라는 특성상 외부에 함부로 개방할 순 없지만 음악을 좋아하는 이가 어쩌다 CD 한 장 들고 함께 듣자며 들를 수 있는 소박한 문화공간이면 족하다”며 “언젠가 사람들과 함께 맘껏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공간을 제대로 마련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