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바람 쐬러 가자고? 아니 피우러
[기고] 바람 쐬러 가자고? 아니 피우러
  • 신아일보
  • 승인 2023.07.04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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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주 작가(수필가)
 

버튼이란 버튼은 죄다 눌러 보았다. 삭제, 삭제, 삭제를 할 수 없었다. 불친절한 설명서는 내 빈약한 인내심을 시험했다. "이런 젠장". 삭제에 관해선 한 구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만들어도 이보단 잘 만들겠다.’ 뭐 이따위로 설명서를 만들어놨냐며 혼자 씩씩거렸다. 

내가 열을 올리며 차 안 블랙박스와 씨름하고 있었던 건 그 날의 증거가 되는 모든 기록을 지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블랙박스가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남편이 차량용 블랙박스를 가져와 내 차에 달아놓으라고 했다. 낡기도 한 차라 다른 차가 슬쩍 긁고 지나가는 것쯤은 눈감아 준 지 오래돼 소용이 없어 보였다. 또, 일부러 설치점에 가야 하니 귀찮기도 했다. 그 작은 상자가 있어야 할 곳은 서랍뿐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블랙박스를 몇 달 후 남편이 찾았다. “블랙박스 어디 있어?” 나는 그런 것이 있었냐며 의심스러운 말투로 블랙박스란 말을 따라 했다. 작은 상자가 들어있을 법한 서랍을 모조리 뒤졌다. ‘그래,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달아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나와 블랙박스와의 동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날 아침은 유독 이불 속에서 빠져나오기 힘든 날이었다. 잠에 눌린 머리를 질끈 매고 간신히 눈곱만 떼고 주섬주섬 목욕 가방을 챙겼다. 아침 운동 마치고 목욕탕으로 갈 생각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할 줄 알았다. 

땀을 내며 체육관 바닥에 엎드려 마무리 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쨍하고 구둣발 하나가 들어왔다. 설마 했다. 그녀가 왔다. 체육관 친구 S였다. 
  
단정한 머리에 늘 말끔한 차림새의 S.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작은 가방을 무릎에 차분히 앉혀 놓고는 운동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대뜸 그녀가 말했다. 

  “어디든 가자.” 
  “어디 가자고, 바람 쐬러 가자고?” 
  “아니, 피우러 가자.” 
  “뭐?”
  
서로 예측 못 한 대화에 우리는 웃음보를 터트렸다. 나하고 한마디 상의도 없이 운동 마칠 시간에 맞춰, 저 혼자 당연하게 외출 준비를 하고 나온 것이다. ‘아침에 뭘 잘못 먹은 게지, 말짱한 정신에 저러기도 힘든데,’ 그런데도 다른 때와 다르게 다크서클이 짙게 드리워진 그녀의 얼굴을 보니 어디든 가야만 할 것 같았다. 
  
투정부리는 어린애 달래듯 그녀를 차에 태웠다. 목적지는 한 시간 거리에 있는 연안부두. 바람은 못 피워도 쐬어줄 수는 있다. 부두에 가면 바람이 많을 거란 단순한 생각이었다. 
  
고속도로를 내달렸다. 우린 얼굴만 봐도 서로 실실거리는 사이긴 하지만, 미리 작정하고 나선 길이 아니라 더욱 신이 났을까. 그날따라 햇살도 유난히 좋았다. 나무는 마지막 축제의 불꽃을 피우고 있었고 바람도 순하게 느껴졌다. 

늦가을, 그녀가 앓고 있었다. 사랑을 하고 싶다고 했다. 무척이나 슬픈 얘기였다. 사랑은 아무나 하느냐고 태진아가 그렇게 노랠 불러댔는데도 자긴 아무나가 아니길 바라고 있었다. 안타까운 현실에 그녀가 있었다. 사실 나도 그 어디쯤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S는 요즘은 애인이 없으면 6급 공무원이란다고 했다. 공무원이고 6급인데, 나는 같이하자고 했다. 근데 이상하지 않으냐고, 애인도 없는데 공무원씩이나 시켜주느냐고 물었더니 6급 장애 판정을 받는다는데, 요즘은 생각하고 말이 다르게 나온다며 그녀가 웃었다. 나도 따라 한참을 웃었다.
  
중년에 접어든 우리도 대충은 안다. 인생 별거 없고, 언제 갈지도 모르는 바람 같다는 걸. 별생각이 다 든다. 더욱이 뜨악하게 몸이 시들어 가는 게 느껴지는 때다. 갱년기가 오네, 마네, 여자로서도 다 끝났나 싶고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생겼다. 

공허함만 들고 인생이 허무하기만 하다. 그래서 결론은 이 모든 허무함을 떨쳐 버릴 수 있는 사랑을 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사랑할 때 우리가 얼마나 행복해지는지, 살아있다는 걸 얼마나 생생히 느끼는지. 
  
이쯤 되니 남자 얘기가 빠질 수 없었다. 남자한테는 여자 얘기가 재밌고 여자한테도 남자 이야기가 제일 재미있다. 연예인 아무개 씨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남자들까지 하나둘 호출해대기 시작했다. 우리는 맘껏 그들의 면면을 파헤쳐 뜯어보았다. 

S는 학창 시절 짝사랑하던 얘기며 결혼 전 마음에 두었던 남자 얘기까지 모두 꺼내놓았다. 그녀는 주로 혼자 사랑을 했다. 마음을 몰래 주었다 거두길 반복했다. 마음이 우산도 아니고 접었다, 폈다 고생깨나 했다고 나는 실소를 터트렸다. 
  
S는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괜찮은 남자가 없더란 소리를 하면서 얼마 전, 버스에서 마주친 중년 남자 얘길 들려주었다. 평범한 차림의 남자였는데, 미남은 더더욱 아니었는데, 그 남자의 체취에 순간적으로 이끌렸었다고 했다. 낯선 남자의 향기가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었다. 그녀의 가슴은 아직 식지 않았다. 
  
나도 배려가 돋보였던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여름날, 만원 버스에서 교통카드를 떨어트린 적이 있었는데 발 디딜 틈 없이 구겨 넣어진 상황에서 카드를 주울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내 모습을 본, 한 중년 남자가 자기가 주워줄 테니 가만히 있으라며 몸을 비틀어 어렵게 카드를 집어주었다. 

그리고 버스 문 앞 계단에 위태롭게 발을 딛고 서 있는 내가 불안해 보였던지 버스 안쪽으로 들어오라고 어깨를 밀어가며 비좁은 틈에서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착해 보이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나는 가끔 그 남자 생각이 난다. 그런 사람들은 버스에서나 스치고 지나갈 뿐,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 주변에는 하나도 없다. 
  
수다의 꽃이 시들 때쯤 인천에 도착했다. 부둣가 근처 맛집에서 허기를 만족스럽게 채우고 식당을 나왔다. 연안부두가 멀찍이 보였다. 바닷바람이 머리카락을 정신없이 헝클어트렸다. 
  “부두에 가면 바람만 더 불겠지, 뭐, 볼 게 있겠어.” 
  “가봐야 고작 떠나가는 배뿐이겠지. 여기서 보는 게 나을 거야.”
  
우리는 배도 부르고 거세게 부는 바람도 성가셔 부두는 바라만 보다 집으로 향했다.바람은 피우지도 못한 날, 블랙박스가 우리를 기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한참 후에야 알게 됐다. 지나다녔던 곳은 물론이거니와 고속도로 통행료 정산 음성까지 고스란히 영상 속에 들어있었다. 

우리가 은밀히 주고받던 얘기를 블랙박스는 엉큼하게 다 듣고 있었다. 누가 볼 것도 아닌데 치부가 드러날까, 제 발이 저리기만 했다. 더 볼 것 없이 삭제해야 했다. 
  
급기야 블랙박스 회사에 연락 했다. 점심시간이란다. 하필, 때도 잘 맞춰 전화했다. 조금 후에 한다는 게 그새 잊고 다 저녁이 돼서야 전화를 걸었다. 업무가 끝났단다. 아, 이런…. 
  
별수 없이 다시 운전석에 앉았다. 커다란 렌즈가 당신의 그 날을 알고 있다며 나를 보고 있었다. 한참을 끙끙대다가 어찌어찌하여 삭제 요령을 알게 됐다. 

그날의 기록을 모조리 지우고 차 안 음성도 녹음되지 않게 설정도 바꿔 놓았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S에게도 우리가 바람을 피우러 간 날,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바람만 맞고 온 날, 모든 기록을 삭제했노라고 말했다. 잘 지웠다며 우린 또 낄낄거렸다. 
  
늙어가고 있다는 것을 몸과 마음으로 체험하는 중이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지금, 그래도 우린 아직 식지 않은 청춘이다. 피어나는 꽃중년이다. 화근의 귀도 떼어냈으니 자, 가자! 어디든.

/김형주 작가(수필가)

[신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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