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 "네, 그럴 수도 있지요"
[금요칼럼] "네, 그럴 수도 있지요"
  • 신아일보
  • 승인 2023.05.19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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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책 이은희 작가

‘인사동시대’를 연 신아일보가 창간 20주년을 맞아 ‘문화+산업’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칼럼을 기획했습니다. 매일 접하는 정치‧경제 이슈 주제에서 탈피, ‘문화콘텐츠’와 ‘경제산업’의 융합을 통한 유익하고도 혁신적인 칼럼 필진으로 구성했습니다.
새로운 필진들은 △전통과 현대문화 산업융합 △K-문화와 패션 산업융합 △복합전시와 경제 산업융합 △노무와 고용 산업융합 △작가의 예술과 산업융합 △글로벌 환경 산업융합 등을 주제로 매주 금요일 인사동에 등단합니다. 이외 △푸드테크 △벤처혁신 △여성기업이란 관심 주제로 양념이 버무려질 예정입니다.
한주가 마무리 되는 매주 금요일, 인사동을 걸으며 ‘문화와 산책하는’ 느낌으로 신아일보 ‘금요칼럼’를 만나보겠습니다./ <편집자 주>

 

 

살아가면서 중요한 결정 뿐 아니라 단순한 것을 결정해야 할 때도 선택을 강요 받는 경우가 있다. 자장면과 짬뽕, 부먹과 찍먹, 심지어 아이들에게 엄마와 아빠 중 누가 더 좋으냐고 묻는다. 하지만 우리들의 삶이나 상황은 미세한 선택의 여지를 허용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빠른 선택은 현대사회에서 의사결정의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는 방법이지만 창의적인 사람에게는 그런 상황들이 다소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중학교 때 일곱 살 터울의 언니가 만나고 있던 사람을 보고 싶어 졸라서 따라간 적이 있었다. 찻집에서 마주한 사람에게 당돌하게도 질문을 했다. 여러 질문을 하며 그 분을 탐색 했었는데 기억나는 한 가지 질문은 무슨 색을 좋아하느냐는 것이었다. 나의 단순한 질문에 그 사람은 마치 처음 들어보는 질문인 것처럼 내 기대와는 달리 애매한 답만 늘어놓았던 기억이 난다. 나이 서른이 다 되어 가는 남자가 자기가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똑 부러지게 말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런 사람이 우리 언니를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부아가 났다. 그가 좋아하는 색이 없었는지 그런 하찮은 질문을 하는 당돌한 중학생 여자아이가 귀찮아서 성의 없는 대답을 했었는지는 모르겠다. 

베이징 국제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칠 때의 일이다. 하얀 피부에 양 볼이 유난히 토실하고 느리게 말하던 1학년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사고로 거의 죽다가 살아났다고 다른 선생님들이 알려주셨다. 소년의 어머니는 자주 학교를 방문했고 아이의 수업을 흐뭇하게 교실 밖에서 관찰하시곤 하셨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수업시간에 빨리 대답을 하지 못한다고 구박하는 친구들에게 자주 하는 말이 있었다. “괜찮아, 모를 수도 있지. 뭐 그거 가지고 그래.” 이 한 마디는 다른 친구들에게 처음엔 모르는 자의 당돌함으로 보였으나 나중에는 서로를 격려하는 힘으로 작용했고 모두에게 너그러움을 선물해줬다. 1학년의 작은 아이는 엄마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었겠지만 큰 사고를 겪은 아이였기에 그 말의 힘은 우리에게 넉넉함이 무엇인지 충분히 알려줬다.

존경하는 변호사님이 한 분 계시다. 이 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좀처럼 얼굴을 붉히시는 법이 없고 항상 듣고 바로 말씀을 하시지 않고 한 템포 느리게 응대해 어찌 보면 답답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분은 급하지 않고 늘 평온하게 말씀하셨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대해 호응을 유도하는 성토를 해도 마지막 그 분의 말씀은 늘 한결같았다. “음 그럴 수도 있지요.” 열띤 대화를 이어가던 사람들에게는 대화의 김이 빠지게 하고, 때로는 머쓱해서 입을 다물게도 하지만 그 분의 한 템포 늦은 그 한 마디는 주어진 상황을 한 번 더 되새겨 볼 여유를 줬다.

어릴 때는 모든 것에 정답이 있고 또 그것을 찾아야만 하는 줄 알았다. 대답이 느린 사람을 보면 대화에서 뭔가 미심쩍은 의도가 있거나 정체성이 불확실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 더 살아보니 세상살이는 보는 관점에 따라 다양한 선택이 있을 수 있고 정답이 정해져 있지 않은 것도 많다는 걸 알게 됐다.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상대를 보거나 상황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삶을 대하는 또 다른 현명한 자세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누가 내게 선호하는 색에 대해 물어본다면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파랑과 초록과 보라를 좋아한다고 대답할 수 있지만 언니의 그 남자 분을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가장 좋아하는 색이 딱히 없으시군요. 네, 그럴 수도 있지요”

-이은희 그림책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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