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25년 전 주공 아파트를 떠올리며
[기자수첩] 25년 전 주공 아파트를 떠올리며
  • 남정호 기자
  • 승인 2020.12.2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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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첫 아파트는 지어진 지 10년쯤 됐던 5층짜리 주공 아파트였다. 51㎡에 절반이 안방이고, 침대와 책상 하나 들어가면 발 디딜 틈 없던 작은 방이 있었다. 거실은 세 식구가 앉으면 꽉 찼다.

나무 몇 그루와 벤치 하나가 전부였던 100m 남짓 슈퍼 가는 길은 늘 설렜다. 고기가 담긴 검은 비닐봉지를 빙빙 돌리다가 땅에 내리꽂고는 '집에 가서 뭐라고 해야 하나' 하는 마음에 철제로 된 투박한 벤치에 앉아 한참을 고민하기도 했다.

단지 내 도로에서 친구들과 롤러스케이트를 타고, 공놀이를 하다 보면 곳곳에서 창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제 그만 들어오라는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앞만 보며 뛰던 아이들은 그제 서야 고개를 들어 하늘에 가득했던 노을을 바라볼 수 있었다.

별다른 특색이 없었고, 고작 3년 남짓을 산 그 집이 아직 기억에 남는 건 처음 살았던 아파트였기 때문일 테다.

이런 주공 아파트에서의 기억이 다시 떠오른 건 LH 공공임대주택에 대한 부정적 신조어가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서다. 아이들 사이에서도 어디에 사느냐, 얼마짜리 집에 사느냐가 중요해진 시대가 씁쓸했고, 또 두려웠다.

올해 LH의 현상설계공모 당선작들을 살펴보면서 다시 그 기억들이 떠올랐다. 올 한해 LH는 공공주택의 질적 향상을 위한 디자인 제시를 목표로 총 84건의 공공주택 현상설계공모를 진행했다.

'함께 사는 공공의 마을, 공공성과 도시성 회복'을 주제로, 입주자들 각각의 삶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주변 지역민들에게도 열린 단지를 만들어 공공의 가치를 높이고 나눔과 소통이 있는 따뜻한 공동체 마을을 조성한다는 계획에 맞춰 다양한 건축적 아이디어들이 제안됐다.

그간 LH는 양질의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하기 위해 달려왔다. 그러나 점점 높아지는 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제 획일적인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해 양적 목표만을 채우는 시대는 지났다. 질적 향상은 물론, 공공임대주택에 대한 부정적 시선을 타파할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LH는 현상설계공모를 그 답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권혁례 LH 공공주택본부장은 인터뷰에서 "공공주택 디자인 혁신 목표가 이런 문제점을 풀어가는 것"이라며 "획일적인 계획이나 다양성의 부재가 낳은 부작용을 다시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신혼희망타운 등 공공임대주택은 그 특성상 '지나가는 집'이라는 성격을 띤다. 그 특성상 그곳에서는 언제나 아이들이 나고 자라며, 신혼부부들은 앞으로의 미래를 그리며 단꿈을 꾼다. 이번에 현상 설계 공모를 통해 지어질 공공임대주택들이 입주자들에게, 또 아이들에게 단지 지나가는 집이 아닌 평생 기억에 남는 추억의 일부를 장식하는 공간이 되길 바라본다.

south@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