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남한산성 - “망나니는 사시나무 떨 듯 떨면서 헛칼질을 해대다 3번 만에 목을 쳤다”
(5) 남한산성 - “망나니는 사시나무 떨 듯 떨면서 헛칼질을 해대다 3번 만에 목을 쳤다”
  • 주장환 작가
  • 승인 2014.04.08 18:3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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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순교자의 피와 병자호란 눈물 담은 곳
수어장대에선 옛 호령 소리 그리워 지기도

“그해 겨울은 일찍 와서 오래 머물렀다. 강들은 먼 하류까지 옥빛으로 얼어붙었고, 언 강이 터지면서 골짜기가 울렸다. 그해 눈은 메말라서 버스럭거렸다. 겨우내 가루눈이 내렸고, 눈이 걷힌 날 하늘은 찢어질 듯 팽팽했다.(중략) 새들은 돌멩이처럼 나무에서 떨어졌고, 물고기들은 강바닥의 뻘 속으로 파고들었다. 사람 피와 말 피가 눈에 스며 얼었고, 그 위에 또 눈이 내렸다.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었다.”

-김훈 소설 ‘남한산성’ 중에서

▲ 북문으로 오르는 길. 그 옛날 이곳을 통해 한강수로를 타고 올라온 조세미를 운반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나라간 치열한 전투는 로마같은 일부를 빼고 대부분 공성전이 승패를 갈랐다. 그러므로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면 무조건 성부터 쌓았다. 그것이 땅과 백성을 지키고 국가를 수호하는 첫 번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축성은 그 시대의 과학기술이 총망라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이 바로 그런 곳이다. 이곳은 국난극복의 자궁터이자 조선 중기 토목과 건축 기술은 물론 과학과 종교 그리고 군사문화가 총체적으로 집약된 곳이다. 성곽에는 반도에 사는 조선 백성들의 피와 눈물의 역사가 오롯이 배어있다. 그 피와 눈물은 병자호란에서 신유박해 등 4대 박해로 이어 흘렀다.

■ 꽃비처럼 진 순교자들

남한산성 관리사무소에서 중부면사무소까지 308번 국도를 따라 8㎞거리에 벚나무가 늘어서 있다. 남한산성 벚꽃 길은 입구에 들어서면서 부터 푸른 하늘을 등에 업은 흰 꽃잎이 비처럼 떨어지는데 4대 박해 때 꽃처럼 진 순교자들의 넋이 붙어 저리도 고운가 싶을 정도다. 누가 말했던가? ‘고진감래 끝에 움터 올라 세상을 만나 한바탕 즐기려 했더니 비바람이 목을 친다’고 말이다.

산성로타리 방향으로 가면 로타리 주차장에서 ‘포도청 터’ 표지판을 만날 수 있다. 포도청의 형체는 세월의 간난신고에 사라져 버리고 없지만 억울한 백성들이며 순교자들이 모진 매질에 하나님을 그리워했을 그런 곳이었을 것이다.

종로에서 서북쪽, 즉 국청사 방향에 행궁터가 있는데 이 일대를 행궁으로 그럴 듯하게 조성해 놨다. 남한산(성)은 백제의 수도 한가운데에 있던 산이었다. 북한산에 대응해 남한산이라 한다고 했다.

1998년 이곳을 발굴할 당시 백제 초기 토기 파편들이 나왔다. 또 2개의 저장용 웅덩이가 발견돼 확인해 본 결과, 한성백제시대 유구(遺構)로 판명됐으며 행궁터에선 옛 건물 터가 분명히 드러나고 거대한 기와가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기와 길이 64cm에 무게는 조선 기와의 4배나 되는 20kg인데다가 ‘천주,갑진년말촌주(天主,甲辰年末村主)’라 새겨진 명문(銘文)이 발견돼 신라의 주장성 터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일기도 했다. 삼국사기에 보면 ‘문무왕 12년조(672년)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이다(築寒疝州晝長城 周四千三百六十步)’란 내용이 있다.

남한산성의 행궁은 피난길에 두 번이나 창피를 당했던 인조가 머물렀던 곳이다. 두 번의 창피 중 한 번은 이괄의 난으로 서울을 떠났으나 그를 따르는 백성은 아무도 없었고 한강변에서 배를 타려 했을 때 백성들은 인조가 탈 배를 숨겨놓기까지 했다. 또 한 번은 청나라가 쳐들어오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45일간 항전하다 삼전도로 향했을 때 일이다.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500여 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청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그리고 난 후 소파진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신하들이 서로 먼저 건너려하다가 몸싸움을 일으켜 왕의 옷소매까지 붙잡기도 했다. 신하나 백성들로부터 왕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한 ‘대략난감형’ 왕이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살아갈 희망을 담으려 했음이 틀림없다.

종로에서 오른쪽으로 접어들어 벚나무 몇 그루 만날 정도의 길을 내려가다가 골목길로 들어서면 천주교 순교성지가 나오는데 ‘순교자 현양비’란 글씨가 큰 돌에 새겨져 있다. 기해, 병인박해 때의 순교자들의 이름이 보인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개천 옆으로 성당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가면 마리아상이 보이고 ‘십자가의 길’로 들어서는 등성이 나타난다. 총 14처로 이뤄진 십자가의 길에는 고난의 삶을 그려놓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한덕운은 충청도 홍주 출신이며 세례명은 토마스이다. 처음 천주교를 접한 것은 1790년 윤지충을 통해서다. 윤지충이 신해년 박해로 순교하자 신앙생활을 위해 경기도 광주로 이주했다. 한덕운은 사기그릇 행상인으로 변장해 서울 청파동과 서소문 일대를 돌아보다 순교자 홍낙민(루카)와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발견하고 거뒀다. 그는 이후에도 순교자들의 시신을 돌보는 일을 계속해오다 체포돼 남한산성으로 끌려왔으며 1802년 1월 30일, 남한산성 동문 밖에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참수형을 당했다.

형장에 끌려가는 동안 한덕운은 턱을 괴는 나무토막을 자신이 직접 손으로 받칠만큼 담담했다고 한다. 그는 자신을 치려는 망나니에게 “한 칼에 내 머리를 베어 달라”고 부탁해 망나니의 간을 콩알만 하게 했다. 망나니는 사시나무 떨 듯 떨면서 헛칼질을 해대다 3번 만에야 목을 쳤다. 그의 나이 50세였다.

박해사를 이야기하면서 얼굴에 물에 적신 한지를 발라 숨을 못쉬게 하여 죽이는 도모지(塗貌紙/白紙死址)형(刑)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죄인의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한 뒤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붙여 숨을 못 쉬게 하여 죽이는 방법이다. 도모지의 오늘날 표기가 ‘도무지’라는 말도 있다. 이는 조선시대 고문 방법의 하나이며 비밀집단같은데서 배신자들을 은밀히 죽이거나 패륜을 저지른 집안사람을 아무도 모르게 죽이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병인박해에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이 뒤편으로 남한산성 역사관이 있으며 그곳에서 뒤로 나서면 개원사를 만나게 된다. 목가적이라 할 수는 없으나 마음을 씻기엔 충분한 곳이다.

개원사에서 검복리 쪽으로 성큼 내려가면 남한산성의 제11암문이라고 하는 '동암문'이 있다. 암문은 성에서 구석지고 드나들기 편리한 곳에 적 또는 상대편이 알 수 없게 꾸민 비밀문이다. 암문을 통해 적에게 발각되지 않고 성을 빠져나간 군사들이, 적의 배후를 공격하기도 했다. 암문 내측에는 석축 옹벽이나 흙을 쌓아서 유사시 옹벽을 무너뜨리거나 흙으로 메꾸어 암문이 폐쇄될 수 있게 만들어놓기도 하였다.

남한산성에는 성곽을 따라 모두 16개소의 암문이 있다. 동문에 인접한 이 동암문은 폭 2.86m에 달하는 것으로 암문 중에는 가장 큰 문이다. 이렇게 큰 이유는 성 안으로 드나드는 우마차가 이곳을 이용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는게 안내원 설명이다.

동암문을 시구문이라고도 한다. 신유박해, 기해박해에서 한덕운등 3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이 이곳을 거쳐 밖으로 버려졌다. 버려진 시체는 가족이나 일가붙이들이 수습해 가거나 그저 버려져 썩기도 했으며 늑대등 맹수의 밥이 되기도 했다.

▲ 시구문. 한덕운등 300여명의 천주교 신자들의 시신이 이곳을 거쳐 밖으로 버려졌다.

동문 길을 따라 산으로 오르면 장경사가 보인다. 그 좌편 8부 능선엔 망월사가 자리하고 있으며 장경사 길을 따라 숨차든 말든 눈 딱감고 오르다보면 정상인 벌봉(봉암)에 오를 수 있는데 하남시를 발아래 두고 싶은 사람만 올라가도 누가 뭐라 그러지 않는다.

남한산성 축성 1등공신은 승려 벽암 각성이다. 스님은 구례 화엄사 출신으로 당시 승려를 대표하는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의 직책을 맡아 7개의 사찰을 창건했다. 또 경남 합천 가야산 해인사 국일암을 중건하는데 한 몫했다.

1636년 병자호란 때는 왕이 남한산성으로 천도하자 전국 사찰에 ‘총궐기하여 오랑캐를 쳐부수자’는 격문을 보냈다. 승군 3,000명이 모이자 이를 항마군(降魔軍)이라 칭하고 호남의 관군과 함께 남한산성으로 향하였으나 가는 도중에 임금의 항복 소식을 듣자 항마군을 해산하고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사찰 창건은 불교의 힘을 빌려 청나라군을 물리치고자하는 바람이었다. 이후 산성 내 사찰은 1894년 갑오경장때까지 수도권을 지켜온 호국사찰이요 승군본영지의 역할을 했다. 각 절에는 무기와 화약을 비축했으며 1905년까지도 보관돼 오다가 ‘아직도 뉘우칠줄 모르는 후안무치 일제’에 의해 사찰들이 잿덩이로 변했다.

■ 치솟은 소나무 “일품”

1896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후 봉기한 의병들 중 경기 의병이 이천 의병들과 연합하여 남한산성을 점거했다. 여기서 한성으로 나아가 공격을 할 작정이었으나 관군에 체포된 김귀성이란 자가 남한산성 성벽 서쪽이 파손돼 있다고 밀고해 모두 잡히는 바람에 ‘말짱 도루묵’이 됐다.

개원사에서 남문 쪽으로 방향을 틀려다가 점심을 먹기 위해 종로 쪽으로 와서 개천에 접한 음식점에서 다리쉼 겸 주린 배를 채웠다. 느긋하게 나오는 비빔밥을 백골부대 병사들 밥먹는 식으로 뚝딱 해치우고 북문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북문을 따라 올라가는 길은 조금 어수선하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첫 이미지가 좋아야 하는데 늘어선 음식점들이 운치를 깨뜨리고 있었다. 게다가 차량들이 오가며 내뿜는 매연과 뿌연 먼지가 종로통 보다 심하다. 정 음식점이 그 곳에 있어야 한다면 문화적인 냄새가 나게 좀 꾸며 보든지 그도 아니면 꽃나무라도 풍성하게 심어서 먼데서 오는 이방인들의 노고를 씻어줬으면 싶다.

왼편으로 침괘정이란 꽤 어려운 이름의 건조물이 보인다. 온돌과 마루방, 툇마루 등이 갖춰져 있는 것으로 미뤄봐 사무실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문으로 枕戈亭(침과정)이라 쓰는데 ‘창을 베고 잠을 자는 정자’란 뜻이다. 군대 있을 때 총을 들고 군화 신고 철모를 베고 잠을 자는 경우가 있는데 아마 그런 비장한 뜻이 아닌가 한다. 명나라 사신 부총병 정룡이 총융무고(摠戎武庫)라 불렀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 부근에 무기고나 무기제작소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침괘정 오른쪽에는 연무관이 있다. 인조 2년 때 군사들의 훈련을 위해 지은 것이라 한다. 논산훈련소등 우리나라 각 훈련소 등에 있는 연무대를 연상하면 크게 무리가 가지 않는 비유다. 그 뒤로는 현절사가 자리하고 있는데 그 유명한 병자호란 삼학사(윤집, 오달제, 홍익한)를 기리는 곳이다.

숨이 찰 듯 말 듯한 기운으로 조금 올라가면 북문에 다다른다. 북문은 올라가면서 보면 비스듬해 보이는데 아마도 내리막 경사에 지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 이곳을 통해 세곡을 운반했다. 한강수로를 타고 올라온 조세미는 창모루와 둔지나루터에 하역된 후 마차나 등짐으로 산성 안으로 운반되어 비축됐다. 북문 단층 문루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이며 겹처마를 두른 팔작지붕을 올렸고,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 기둥을 세웠다.

여기는 아직 봄의 전령사가 미처 도착하지 못했는지 스산함 마저 든다. 꽃나무라도 옹기종기 모아 놓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성 밖으로 나아가면 신갈나무나 굴참나무 등도 심심찮게 볼 수있다. 병자호란 당시에는 성문을 열고 나가 기습공격한 장소다. 아무래도 길이 낮고 재빠르게 뛰쳐나갈 수있는 지형이어서가 아닌가 한다.

이 길을 조금 올라가면 서문에 닿는다. 그 전에 좌측 능선 아래로 십자가 모양의 석조 구조물이 보였다. 호기심이 일어 내려가 봤지만 철망으로 둘러싸여 접근이 어려워 무슨 구조물인지 파악하지 못했다. 사람들에게 물어봐도 고개만 설레설레 흔든다. 개인이 세워 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 장정 두 셋은 품어야 안기는 적송들이 수두룩하다. 소나무군집 지역.

이 부근은 하늘로 치솟은 소나무가 일품이다. 장정 두 셋은 품어야 안기는 적송들이 수두룩하다. 소나무군집은 전체 식생면적 중 20% 정도만 남아 있다고 하니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이 길을 땅과 소곤거리듯 걷노라면 오른편 성곽너머로 서울시 송파지역 일대를 조감할 수 있다. 마침 황사가 심해 희붐해 보였으나 맑은 날엔 지도를 들지 않고도 가락시장이며 잠실 롯데까지 볼 수가 있다. 올라오느라 다리가 아프고 정신이 덜 맑은 사람들은 아래쪽 국청사로 가서 약수 한 모금하고 고즈녁한 풍경소리도 들으면 좋다.

■ 옹성보며 옛 혼 기려

서문은 송파나무 방면에서 산성으로 들어오는 가장 빠른 길이었다. 이곳에 다다르면 송파지역을 향해 보란 듯이 한 숨 크게 쉬고 수어장대에 올라보자. 호연지기가 저절로 생긴다. 남한산성에는 지휘소인 4개의 장대(將臺)가 있었다. 동서남북 방향으로 각각 하나씩 세웠는데 지금은 서쪽 장대에 해당하는 수어장대(守禦將臺)만이 홀로 남아 옛 호령 소리 그립게 한다. 수어장대에선 경기도 광주시, 하남시, 성남시, 서울시 송파 가락동 등 사방을 볼 수 있다. 날이 맑은 때엔 남산이며 북한산도 어렵지 않게 눈에 고인다.

▲ 수어장대. 옛 무인들이 기상 넘친 호령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수어장대 마당 왼편 작은 누각이 옆에 전나무가 한그루 서있는데 ‘단기 4286년(1953년) 9월 6일 리대통령 각하 행차 기념식수’라 쓰여진 표지석이 보인다. 1953년 가을이면 휴전이 되고 나서다. 이승만대통령도 고단한 전쟁 끝에 병자호란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는지도 모르겠다.

수어장대를 내려오면 경사가 급한 길이다. 이 길을 따라 내려오면 왼편에 무궁화 동산이 있어 여름이면 벌들이 몰려든다. 조금 더 걸음하면 산성터널을 만난다. 바로 남문이 있는 곳이다. 왼편멀리 산성 중앙에 행궁과 만해 한용운 기념관이 보인다. 바로 왼편으로는 남한산성비석들을 모아놓은 비석군이 새초롬하게 모여 있다.

남문을 지나 산성과 행보를 같이하면 옹성(甕城) 3개를 연달아 볼 수있다. 성을 쌓을 때는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성벽으로 접근해 온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게 축성하는데 이때 튀어나온 돌출부를 옹성 또는 치성(雉城)이라 부른다. 남한산성 남쪽 성벽에는 3개의 옹성이 있으며 장경사신치옹성이 있다.

다시 병자호란이 일어난 1636년 병자년 겨울로 되돌아 가보자. 청나라 10여만 대군이 남한산성을 에워싸자 내분이 일어난다. 작가 김훈은 “쓰러진 왕조의 들판에 대의는 꽃처럼 피어날 것이라는 척화파와 삶의 영원성은 치욕을 덮어서 위로해줄 것이라는 주화파. 그들은 47일 동안 칼날보다 서슬 푸르게 맞선다. 성 안팎에 봄은 기어코 오는데, 살 길은 실천 불가능한 자존과 실천 가능한 치욕 사이로 뻗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 남한산성은 ‘삶과 죽음의 등치에 관한 참담하고 고통스러운 낱낱’의 장소다. “김상헌의 칼에 쓰러진 ‘송파나루의 뱃사공’, ‘적진을 뚫고 안개처럼 산성에 스며든 어린 계집 나루 ’등이 병자호란의 상징을 톺아보는 존재들”이라면 한덕운 이학록, 이정현등은 4대 박해의 숭고한 상징을 기리는 존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