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만에 가득 찬 수양제를 비웃는 소리만 남았구나
불만에 가득 찬 수양제를 비웃는 소리만 남았구나
  • 황미숙
  • 승인 2013.07.15 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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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조선 개국공신 문충공(文忠公), 조준(趙浚)

조준(趙浚)[1346년(고려 충목왕2)~1405(조선 태종5)]의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명중(明仲), 호는 우재, 송당이다. 문하시중 인규(仁規)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판도판서 덕유(德裕)이다. 아들 대림(大臨)이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慶貞公主)와 혼인해 태종과는 사돈이 된다.
치열한 권력쟁탈전이 벌어지던 1392년 정몽주 일파의 탄핵을 받아 정도전과 함께 체포됐다가 정몽주가 피살되자 풀려난 후, 이성계를 추대해 개국공신 1등으로 평야백에 피봉되고 문하시중의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정도전과 같이 했던 그는 조선개국 일등공신에 책봉된 후 왕위 계승문제와 요동정벌문제에서 정도전에 반대하고 이방원을 지지해 태종 즉위 후 영의정부사에 올랐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태조의 묘정에 배향됐다.
조준은 사학(史學)을 잘하고 경학(經學)과 시문에도 능했으며, 문집으로 ≪송당집≫을 남겼다. 한편, 그의 전제개혁안은 부국강병과 민생안정에 목표를 둔 것이었다.
제1차 전제개혁 상소에서는 관리와 군인 그리고 국역담당자의 생계를 안정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제2·3차의 전제개혁 상소에서는 세신거실(世臣居室)이 경기 이외의 외방에까지 사전(私田)을 두려는 움직임을 저지하고, 기내사전(畿內私田)의 원칙을 고수, 전제개혁의 지역적 안배를 설정했다.
1391년 5월에 정해진 과전법은 그의 개혁안이 토대가 된 것이며, 그가 여말에 올린 국정개혁안은 ≪주례 周禮≫에 바탕을 둔 것으로 광범위한 사회개혁안을 포괄하고 있다.
즉, 총재(재상)의 권한을 강화하고, 대간과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며, 양천신분제(良賤身分制)를 확립해 국역체제를 강화하고, 경연과 서연제도를 실시하며, 학교(향교)제도를 강화해 사장(詞章)을 폐하고 사서오경을 배우도록 할 것,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시행할 것, 의창(義倉)과 상평창(常平倉)·사창(社倉)의 법을 시행할 것, 향리의 출사(出仕)를 억제할 것, 환자(宦者)의 정치 참여를 막을 것, 과거시험에 복시제(覆試制)를 시행할 것 등을 제시했다. 그의 관제 및 사회개혁안은 정도전의 그것과 상통하는 점이 많으며,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朝鮮經國典≫ 및 ≪경제문감 經濟文鑑≫ 편찬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태조의 묘정에 배향됐다.
강원도 양양군 기암절벽이 바다에 서있고 기이한 경관을 이루는 암벽위에 하조대(河趙臺)가 있다. 고려 말 신돈의 비행을 공박하는 한편 최영장군의 요동 공략이 불가하다고 반대하다가 양주지방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하륜(河崙)과 최영의 취하에 있다가 우왕의 폐위를 도모한 바 있던 조준(趙浚) 두 사람의 성을 따라 ‘하조대’라 이름 지어졌다고 한다.
그들이 이곳 하조대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고려가 기울어져 나라 안이 어지러웠을 때, 벼슬살이를 하던 두 사람은 나라의 정세로 보아 고려왕조의 왕통이 그대로 지탱할 수 없으므로 새로운 왕조를 건립해야 하겠다는 뜻을 품고 벼슬을 버리고 풍광이 좋다는 이곳으로 내려왔다. 이곳에서 두 사람은 새 왕조 건립의 모사를 했으며,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자 벼슬길에 오르기 위해 이곳을 떠났다고 전한다.
또한 시문에 뛰어났던 조준(趙浚)이 명나라 사신이 큰 나라에서 왔음을 핑계로 오만방자함을 떨자 사신을 대동강가로 초청해 이 시를 지어 기를 죽였다고 한다. “살수는 거침없이 흐르고 푸른 하늘은 빛나는데(薩水湯湯瀯碧虛), 수나라 백만 군사는 물고기가 됐구나(隋兵百萬化爲魚). 이제 여기와 머물러 어부와 나무꾼의 얘기 들으니(至今留得漁樵語), 불만에 가득 찬 정복자(수양제)를 비웃는 소리만 남았구나(不滿征夫一侏餘).”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