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
  • 황미숙
  • 승인 2012.07.23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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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전국시대 초나라의 시인, 굴원(屈原)
굴원((屈原, B.C 340년~B.C 278년)은 이름이 평(平)이고, 자는 영균(靈均)으로 초나라 왕족 출신이다.

굴원은 중국의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 중의 한명이다.

그는 ‘초사(楚辭)’라는 문체를 창립했으며, 대표작 《이소(離騷)》는 중국에서 가장 긴 서정시이다.

굴원의 작품은 서한(西漢)의 유향(劉香)이 편찬한 《초사》에 실려 있다.

굴원은 젊은 시절 초나라 회왕(懷王)의 신임을 받아 좌도(左徒)와 삼려대부의 중책을 맡아 국사를 담당했고 법률제정에 참여했다.

굴원의 노력은 초나라는 국력을 일정한 정도로 향상시키었으나 본인의 솔직한 성격, 타인들의 이간질과 배척에 의해 초나라 회왕은 점차 굴원을 멀리하게 되었다.

이후 굴원은 유배와 해배를 거듭하였다.

기원전 305년 굴원은 초나라 회왕과 진(秦)나라의 황극지맹(黃棘之盟) 체결을 반대하였으나, 결국 초나라는 진나라와의 동맹을 결정한다.

진나라는 초나라 회왕이 진나라의 상어(相於) 600리의 땅을 탐내고 있을 것을 알아차리고는, 장의(張儀)를 보내어 제나라와 외교관계를 끊으면 땅을 주겠노라고 제안한다.

초나라가 제나라와의 외교관계를 청산하고 회왕은 약속이행을 요구 했다.

그러나 장의는 “저는 6리를 드린다고 했을 뿐 입니다.

”하고 발뺌을 하자 이에 화가 난 회왕은 전쟁을 일으켰지만 도리어 초나라의 6군을 빼앗기었다.

초나라 회왕이 진나라의 계교에 빠져 객사하자, 회왕의 장남인 경양왕(頃襄王)이 즉위하고 막내아들인 자란(子蘭)이 초나라 상국이 되었다.

자란이 굴원을 경양왕에게 참소하여 대부의 직에서 파직하고 쫓아내자, 굴원은 초왕(楚王)을 걱정하며 지금의 동정호(洞庭湖) 부근을 배회하다가 기원전 278년 5월 5일, 멱라수(汨羅水)에 돌을 품고 빠져 죽었다.

중국에서는 지금도 단오절인 이 날을 ‘시인의 날‘로 기념하고 있으며, 또한 용선(龍船) 축제는 굴원의 유체를 찾던 것에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굴원이 이미 추방을 당하여, 상강(湘江)의 못 기슭을 거닐며, 시부를 읊고 있었다.

어부가 보고서 묻기를 “당신은 삼려대부가 아니십니까. 무슨 까닭으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굴원이 말하기를 “온 세상이 모두 악에 물들어 흐려졌는데 나만 홀로 맑으며, 많은 사람들이 모두 옳지 못한 일에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으니, 이 때문에 미움을 받아 이곳으로 추방을 당한 것이라오.” 어부는 말하였다, “성인은 사물에 구애함이 없어 세상과 함께 추이를 같이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악에 물들어 흐려져 있으며 어찌하여 진흙을 휘저어 같은 흐린 물결과 동조하지 않으며, 뭇사람이 다 명리에 취해 있으면 어찌하여 그 찌꺼기를 먹는 것과 그 순미(醇味)를 거르고 난 박주(薄酒)라도 빨아들이는 것을 하지 않습니까. 무슨 까닭으로 깊이 생각하고 높이 행동하여 자기 스스로 추방을 당하게 하였단 말입니까.” 굴원이 말하였다.

“내 들은 말이 있는데, 새로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관을 쓸 때 먼지를 떨어서 쓰고, 새로 몸을 씻은 사람은 옷을 떨친 후에 입는다고 하였소, 어찌하여 그 깨끗하고 조촐한 몸에 외물(外物)의 더러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소. 차라리 그럴 지경이면, 상수(湘水)에 나아가 강물에 몸을 던져 고기의 뱃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어찌하여 이 결백한 몸에 세속의 띠끌과 먼지를 둘러쓴단 말이오.” 굴원의 이 말을 들은 어부는 빙그레 웃으며, 노를 가지고 뱃바닥을 울려 장단을 맞추고 노래를 부르면서 돌아갔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滄浪之水淸兮:창랑지수청혜), 내 갓끈을 씻고(可以濯吾纓:가이탁오영), 창랑의 물이 흐리면(滄浪之水濁兮:창랑지수탁혜), 내 발을 씻으리라!(可以濯吾足:가이탁오족)” 굴원은 천하가 부패하고 술에 취해 있는데 함께 어울리지 못하였다는 것이 추방의 이유라며 한탄하였다.

이러한 굴원의 태도에 대하여 어부는 굴원이 비타협적이고 고고한 처세에 대하여 비판을 한다.

어부는 굴원에게 이상과 현실세계를 구분하지 못함을 나무라고 있다.

그러나 어부는 굴원에게 현실과 타협하라는 주문이라기보다는 나라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에 어찌 홀로 강가를 거닐며 한가롭게 남의 탓을 하는가에 대한 질책인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굴원이 그의 재능으로서, 제후들 사이를 돌아다녔다면, 어떤 나라가 받아들이지 않았을까마는, 스스로 이와 같이 된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남들이 취하면 나도 취해야 한다고 해야 하는 것인가. 사회에 적응하여 살기 위해서는 적당히 사는 것, 맞추어 사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제 한 몸 안위를 위하여 그 무엇도 마다하지 않는 세태에 따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인가. 아직도 꼿꼿하게 스스로를 추스르며 살아가는 이들이 있어, 흔들리는 물결에 몸을 싣고 살아가는 자들도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