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치의 혀가 군사 백만 명 보다 강하다
세치의 혀가 군사 백만 명 보다 강하다
  • 황미숙
  • 승인 2012.05.2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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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전국시대 말기 4군자-조(趙)나라 평원군(平原君) 조승(趙勝)
평원군 조승(趙勝: 趙 武靈王의 아들이며 惠文王의 아우)은 조나라의 여러 공자(公子)들 중의 하나다.

여러 공자들 중에서 승이 가장 현명했다.

빈객을 좋아해 그의 집에는 수천 명이 모여들었다.

평원군은 조나라의 혜문왕(B.C 298-266)과 효성왕(B.C 265-245)의 재상이 되고 세 번이나 재상 자리를 떠났으나, 세 차례 다시 재상 자리를 회복했고, 동무성(東武城)에 봉해졌다.

B.C 258년, 진나라가 한단을 포위하자 조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초나라와 합종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초나라로 합종을 위해 평원군이 가게 되었는데 문무의 덕을 겸비한 빈객 20명과 동행하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나 평원군은 식객 중 19명을 얻었으나, 나머지 한 명은 해당하는 사람이 없어 20명을 다 채우지 못했다.

평원군의 문하에 모수(毛遂)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평원군 앞으로 나오더니 스스로 자기를 천거하였다.

그러나 평원군은 말하기를 “무릇 현명한 선비가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마치 자루 속의 송곳과 같아 당장에 그 끝이 드러나 보이는 법입니다.

그러나 선생은 3년이나 이 사람의 집에서 기거했음에도 내 좌우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선생에 대한 칭찬 한 마디 하지 않고 나 또한 들은 적이 없으니 이는 선생이 가진 재주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오. 선생은 나와 함께 같이 갈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으니 집에 남아있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에 모수는 “이 사람이 오늘 이 자리에서 군의 자루에 들어가기를 청합니다.

이 모수가 군의 자루에 일찍부터 들어가 있었더라면 몸통 전체가 다 드러났을 것입니다.

어찌 송곳만 들어나겠습니까?”라고 하자 평원군은 결국은 모수도 같이 동행하는 것을 허락했다.

19명의 선비는 서로 눈짓을 하며 모수를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초나라에 도착한 평원군은 합종을 성공시키려고 모수를 뺀 몇 명씩의 대표단을 당상으로 올라가 열전을 벌였으나 며칠째 결론을 보지 못하고 심지어는 초나라 합종 반대파들에 의해 협상은 완전한 결렬 위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당 아래에 있던 모수는 장검을 허리에 찬 채 당상으로 급히 뛰어 오르며 협상 대표인 평원군에게 외쳤다.

“합종의 결론은 이로운가 해로운가 딱 두 마디로 요약됩니다.

그토록 간단한 일을 가지고 며칠씩 걸려도 결론을 못 내리니 어찌된 겁니까!” 이 말을 들은 초왕은 모수를 업신여기며 꾸짖었다.

모수는 초왕의 호통에도 기죽지 않고 오히려 이번에는 장검을 휙 빼들며 소리 질렀다.

“대왕께서 저를 꾸짖음은 초나라의 병사 많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열 걸음 안에는 대왕과 저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대왕의 생명은 제 손안에 들어 있습니다.

진나라의 애송이 장군 백기(白起)는 불과 수만 명을 거느리고 와서 언·영을 공략하고, 이릉(夷陵)을 불사르고, 선대(先代: 頃襄王)왕의 능묘를 욕보였습니다.

이것은 초나라에게는 백 대가 지나가도 잊을 수 없는 통한의 과거가 아닙니까. 조나라에서도 초나라를 위하여 부끄럽게 여기고 있거늘 도대체 진나라를 증오할 줄 모르는 초나라의 대왕께서는 어찌된 것이옵니까?”하였다.

초왕은 합종을 결정하였다.

드디어 닭·개·말의 피(天子는 牛·馬, 제후는 개·돼지, 大夫이하는 닭을 사용)를 입술에 바르는 의식으로 합종은 맹약되었다.

평원군은 무사히 합종을 결정짓고 조나라로 귀국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지금까지 선비의 관상을 보아 온 숫자는 적어도 일천을 넘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잘못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노라 자부해 왔다.

그런데 모 선생의 관상은 결정적으로 잘못 본 경우이다.

모 선생이 한 번 초나라에 가자 조나라를 구정(九鼎:夏禹氏가 九州의 쇠를 모아 만든 큰 솥, 夏·殷·周 三代의 보물)이나 대려(大呂: 周나라의 大鍾으로 天子의 尊位를 상징)보다 무겁게 만들었다.

모선생이 한 번 놀린 세 치 혀는 백만 명의 군사보다 강했다.

나는 감히 다시는 인물을 감정하지 않겠다.

” 평원군은 드디어 모수를 상객(上客)으로 극진히 모셨다.

《사기》에서 사마천은 평원군을 혼탁한 세상에서 보기 드문 재사(才士)이었으나 대국을 통찰하는 지혜까지는 없었다고 평하고 있다.

공자는《논어》위령공편에서 ‘知者 不失人 亦不失言(지자 불실인 역불실언)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잃지 아니하며, 또한 말을 잃지 아니한다.

’고 하였다.

사람도 잃고, 뜻도 잃고, 삶을 잃고도 지혜를 얻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보잘 것 없는 재주만을 믿고, 아첨하고 스스로 안주하며 목소리 큰 모수자천(毛遂自薦)하는 자들이 낭중지추(囊中之錐)의 인물인지를 어찌 우리가 알아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