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강화도 돈대(墩臺) - 강화도령 이야기와 병자호란 '양요를 받아낸 지킴의 무대'
(9) 강화도 돈대(墩臺) - 강화도령 이야기와 병자호란 '양요를 받아낸 지킴의 무대'
  • 주장환 작가
  • 승인 2014.06.04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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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곶돈대 안 탱자나무는 역사의 기록자
치열하게 싸우던 역사의 최일선 현장

“눈 위를 기어 다니던 갓난아이가 혹은 죽기도 하고, 혹은 죽은 어미의 젖을 여전히 빨고 있는 아이들을 볼 수 있었다.” <연려실기술>

1637년 1월 22일, 아침부터 죽음의 그림자가 몰려왔다. 눈 깜짝할 사이에 적선 40여척이 바다를 뒤덮었다. 갑곶에 발을 디딘 청군 3만 명이 강화도 내에서 움직이는 것들은 모조리 도륙내 버렸다.

그 참혹한 날로부터 377년이 지난 2014년 초여름. 강화도의 돈대(墩臺)는 외로웠다. 특히 바다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기에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햇살이 대지를 강하게 내리쬐는 오후가 되면서 속살까지 타들어 갔다. ‘타는 목마름’이었다.

김지하의 목마름과는 종류가 달랐지만, 필자 역시 타는 목마름을 느끼며 돈대의 길을 따라 갔다. 그 길에는 수많은 원혼이 떠돌고 있었다. 역사의 숨결을 따라 가는 길이 반드시 낭만적인 것만은 아닌 것이, 바로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 때문이다. 강화도는 내토 깊숙이 파고드는 수많은 원혼들의 아우성을 가만히 있어도 들을 수 있는 그런 곳이다.

▲ 강화도 나들길 2코스 안내도. 갑곶돈대에서 남쪽으로 초지진까지 가는 코스로 총 15.1km의 걸음걸이다.

■ 돈대는 방위 - 정원시설

강화도에는 해안을 따라 1~3킬로미터 간격으로 돈대가 있다. 섬의 북쪽 해안은 한강 하류와 닿아 한강의 장중한 소멸을 지켜본다. 동쪽은 좁은 해협인 염하강이 구불거리며 김포와 강화도를 나눠주고, 남쪽으로는 거대한 갯벌의 허전함이 여행객을 심란케 한다. 남서쪽으로는 까무룩한 바닷길이 햇살을 담고 묵묵하며, 서쪽으로는 석모도, 교동도, 볼음도, 주문도 같은 새끼 섬들이 그림처럼 떠있다.

외세 침략의 전초기지였던 강화도는 한민족의 고난을 부둥켜안고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투쟁의 땅으로, 몽골 침입에 결사항전 하기 위해 행한 1232년 천도로 고려의 수도가 되었던 곳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첫손 꼽히는 성지로 마니산 참성단에서는 단군조선의 건국을 기리는 제천 행사가 매년 열리고 있다.

몽골의 말발굽이나 조선을 한 입에 삼키려는 제국주의의 야욕이 이리떼처럼 달려들 때에도 돈대는 언제나 이곳에 묵묵히 서서 조국을 지켰다.

돈대는 경사면을 잘라 내거나 흙을 돋워 쌓아 얻어진 계단 모양의 평탄지를 옹벽(擁壁)으로 받친 부분을 말한다. 분수나 연못 등이 조성되는 정원 시설로서의 돈대와, 성곽이나 변방의 요지에 구축하여 총구를 설치하고 봉수시설을 갖춘 방위시설로서의 돈대 2가지가 있다. 정원으로서의 돈대는 경복궁 교태전 후정과 전남 해남에 있는 윤선도 생가 뒤뜰에 있는 것들이 유명하다.

강화도는 또한 효종의 북벌 전초기지 같은 곳이기도 했다. 효종은 이곳에 진(鎭)과 보(堡)를 설치했다. 군사력 강화는 이후 숙종 때까지 추진되어 12진·보와 53돈대, 9포대가 축조·설치됐다. 이것들 중 현재 복원되었거나 상태가 양호한 전적지는 28곳이다.

서울 중심에서 서쪽으로 내달아 김포를 지나 강화대교를 건너 왼편으로 돌아 들어가면, 천주교 순교성지와 갑곶돈대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 강을 건너 왼편으로 돌지 않고 쭉 가면, 연미정과 월곳돈대다. 그 한강 너머는 개풍군이 자리 잡고 있다.

오늘의 여정은 이곳에서 남쪽으로 초지진까지 가는 강화도 나들길 2코스로 총 15.1km의 걸음이다.

갑곶은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 부른데서 연유했다는 이야기와, 고려 때 몽골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데’라며 한탄했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나 어느 것이 정설인 지는 밝혀진 바 없다.

순교성지에 잠깐 들어가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다리쉼도 한 후 갑곶돈대로 내려서면, 가슴이 뿌듯해온다. 파죽지세로 김포 들판을 달려온 몽골군이 건너편 문수산성에 진을 치고 이곳으로 건너오는 방법을 강구하며 땅을 쳤던 곳이다. 팔각정에 서서 바라보는 강화 외성터며, 잿빛 강물에 해무까지 자욱하게 겹쳐 비장감이 되살아난다.

이곳은 또한 우리 역사에 따스한 기억으로 대물림되는 강화도령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필자가 아주 어린 시절에 <강화도령>이란 영화를 본 기억이 있어 자료를 찾아보니, 신상옥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신영균, 최은희, 김승호, 이예춘 등 기라성 같은 스타들이 출연했던 작품이었다.

철종 역의 신영균(원범)이 강화 처녀 최은희(양순)와 사랑을 나누던 장면이며, 궁궐에서 사람들이 나와서 철종을 한양으로 데려가던 장면이 기억난다. 최은희는 숨어서 울고…. 나중에 철종이 그녀를 궁으로 불러 들였던가? 가물가물하다. 그때 누룽지를 먹으며 개울가에서 물을 마시던 장면이 특이하게도 또렷이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리 넉넉치 못했던 60년대 시대 상황과 오버랩 됐기 때문인 듯하다.

▲ 갑곶돈대는 역사의 한이 서린 곳이다. 강화 도령을 모시려 온 영의정이 이곳에서 철종을 만난다.

■ 강화도령 추억 서린 곳

"갑곶진에 이르렀다. 배에서 내리니 강화유수 조형복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왕의) 생김새와 연세도 몰랐다… 내가 말했다. '이름자를 이어 부르지 마시고 글자 한 자 한 자를 풀어서 말하십시오.' 관을 쓴 사람이 한 사람(철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름은 모(某)자, 모(某)자이고 나이는 열아홉입니다.' (대왕대비의) 전교에 있는 이름자였다."

헌종이 승하한 지 이틀 뒤, 당시 영의정이던 정원용은 강화도령 이원범을 궁으로 모셔오는 중책을 맡아 이곳에 다다른다. 상기 글은 그의 일기 <경산일록(經山日錄)>의 한 부분이다.

강화도령이란 이름의 펜션도 있고, 화문석도 그 이름으로 팔린다고 하니 재미있다. ‘강화도령 첫사랑 길’이라고 원범의 생가 용흥궁에서 철종 외가까지 관광 코스가 있다하니, 한 번 둘러보는 것이 강화도까지 가서 노래방에서 시간을 죽이는 것 보다 나을 성싶다. 그래도 정 노래방에 가고 싶다면, 이왕이면 가수 박재란의 노래 ‘강화도령’을 불러보는 것은 어떨는지?

노랫말은 이렇다. ‘두메산골 갈대밭에 등짐지든/강화 도련님 강화 도련님/도련님 어쩌다가 이 고생을 하시나요(중략)/도련님 운수 좋아/나랏님이 되셨구나/음 얼싸 좋다 좋고 좋고 말고/상감마마 되셨구나/상감마마 되셨구나.(하략)’

갑곶돈대 안에는 높이 4.2m에 뿌리목 둘레가 거의 1m나 되며 300-400년이 된 것으로 추정되는 탱자나무가 있다. 수백 년의 풍상을 겪어내며 살아온 이 나무는 사실 방어용이다. 무슨 소리인가 하면, 옛날에는 성벽을 쌓은 다음 도랑을 깊게 파고 물을 채워 적군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걸 해자(垓字)라 하는데, 그러고도 못미더우면 성 아래에 탱자나무를 얼기설기 심어 천연의 가시 울타리를 만들었다.

돈대 안 성벽에서 해안을 바라보니, 백로며 갈매기들이 먹이를 찾아 휘날아 오르거나 곤두박질을 치고 있는 광경이 오늘따라 유난히 치열해 보였다. 그런가 하면, 갯벌 위에 드러난 낡은 어선에서는 알 수 없는 허전함이 묻어났다.

도로는 사람에게 위험요소가 될 때가 많다. 더군다나 걷는 길이 한적하여 거의 차도와 다름없는 곳에서는 차량 자체가 흉기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도로를 따라 자전거로 내달리는 청춘들의 모습에 눈부셔하거나, 이따금씩 거침없이 내달리는 차량들의 굉음을 벗 삼아(?) 걷다 보면 이윽고 누각을 하나 만나게 된다. 바로 용진진이다. 이곳은 1716년에 설치됐는데, 지금은 돌담만 보이고 안에는 깃발만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그다지 볼만한 곳은 못되었는데, 아이들 전쟁놀이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럭저럭 하다 보니 용당돈대까지 왔다. 평면 형태는 타원형이며, 4개의 포좌가 설치됐다. 용당돈대는 한 5분 정도 올라가야 하는 언덕에 있는데, 제법 돈대의 외벽체가 잘 복원되어 깔끔한 느낌을 준다. 포대진지가 구축되어 그 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는 재미가 솔솔하다. 염하강 건너 김포 컨트리클럽이 보인다.

뒤이어 나타난 화도돈대는 아직 거칠다. 간척지 벌 가운데의 작은 동산 위에 있다. 돈대 입구에서 몇 명 인부들이 작업 중이었다. 입구 계단을 오르면, 바로 염하강이 눈앞에 누워 흐른다. 강화유수를 지내던 윤이제가 해안지역의 방어를 튼튼히 하고자 1679에 쌓아놓은 것이라 한다. 동쪽으로 나 있는 수구(水口) 옆에는, 강화유수 한용탁이 1803년 세운 '화도수문개축기사비(花島水門改築記事碑)'가 있다. 스스로 축하한 셈이다.

여기서 오두(鰲頭)돈대까지는 700m 남쪽이다.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계단이 엉성하게 놓여있다), 석벽이 앞을 가로 막는다. 오두는 자라 머리다. 자라 머리 같은 지형에 설치되어 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그만 동산 안에 숨어있어, 땀을 식히기에 안성맞춤이다.

▲ 오두돈대. 자라머리 지형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 신미양요의 증언대

오두돈대에서 2km정도 종종 걸음을 치면 광성보다. 강화도의 5진 7보 53돈대 가운데 규모가 으뜸이다. 이곳은 염하강에서 물목이 가장 좁아 몽골군이 침을 삼켰다고 한다. 그러나 폭이 좁으면 물살이 센 법. 함부로 하지 못했다. 신미양요의 살아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로저스가 지휘하는 미국 함대와의 전투에서 대부분 전사했다.

광성보에는 광성돈대가 있어 당시 사용했던 화포류를 볼 수 있고, 용두돈대에서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와 이은상 선생의 시를 볼 수 있다. 내부는 공원처럼 잘 조성되어 있어 한적하게 데이트를 즐기기에도 그만이었다.

마침 약간 돌아서는 외길에서 뽀뽀하고 있던 청춘남녀가 눈에 들어왔다. 생전 길거리에서 여자를 안고 뽀뽀를 해보지 못한 필자는 못 본 척 휘파람을 불며 얼른 돌아서 ‘걸음아 날 살려라’ 줄행랑을 쳤다. 그 바람에 이들을 몰래 지켜보던 산비둘기 몇 마리가 후더덕 창공으로 날아 올랐다.

▲ 덕진진. 왼쪽어깨에 탄흔이 남아있는 비석이 아픔을 참고 있다.

여기서 큰 걸음으로 1000보 정도 가면, 덕진진이 보인다. 덕진진에서는 오른쪽 어깨에 탄흔이 남아 있는 ‘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 바다 문을 막고 지켜라. 다른 나라 배는 삼가하여 지나지 말라)는 경고비를 만날 수 있다.

멀리 먹구름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바다 위로 해무가 끼기 시작했다. 한동안 필자는 망연히 그 광경을 바라다보았다. 여행 중 문득 부산함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여유로움을 느끼게 되는 때가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 정말 좋다, 행복하다"라는 느낌이 드는 순간으로, 댓잎 사이로 지나가는 바람소리를 듣게 되거나 이슬 같은 빗방울이 흩날리는 모습을 보며 간혹 그런 느낌을 맛보고는 한다. 이날은 해무가 필자에게 바로 그런 역할을 해주었다.

초지대교를 곁에 두고 있는 초지진은 이번 기행의 마지막 코스였다. 성곽의 둘레가 500m도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방어시설로,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양호사건을 온 몸으로 받아낸 곳이다. 안으로 들어서면 멀리 초지대교가 길게 늘어져 있는 모습이 보인다. 누각 안에는 대포가 앉아있다. 밖을 내다보면 파란색으로 단장한 등대가 생경한 이질감을 주며 찰랑이는 파도 속에 보이고, 바위들도 저마다 삐죽이 목을 내밀고 있다. 성곽 입구에는 포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탐이 났다.

길은 삶의 지렛대 역할을 하기도 한다. 길을 가다보면 그곳에서 먼저 간 사람들의 흔적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사람들을 키워낸 바람이며, 물이며, 나무며, 무수한 식물들이 가득하다. 그 길은 여러 세월을 보듬는 또 다른 시간과의 만남으로 우리를 이끌어가고, 지난 삶들을 투영하여 교훈으로 삼게 한다.

그런 의미에서 강화도 여행은, 아프고 시린 그곳의 역사를 짧지만 강하게 느낀 걸음들을 모아 부디 큰 길을 가라는 격언과도 같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