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경기도 고양 - 뼈아픈 고양 벽제길, 회초리같은 일갈에 가슴 “서늘”
(2) 경기도 고양 - 뼈아픈 고양 벽제길, 회초리같은 일갈에 가슴 “서늘”
  • 주장환 작가
  • 승인 2014.02.25 11:34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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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 최영장군묘-벽제관지-용암사-윤관장군묘
▲ 최영 장군 묘소를 올라가는 마을 어귀의 옛집, 장작더미가 겨울채비를 알려준다

윤관장군과 최영장군의 묘역에선 영화의 그늘이
여주길 서러운 선조와 벽제관 전투가 마음에 젖어

최영장군 묘역을 올라가는 에움길에서다. 누르스럼한 갈기를 세운 겨울새 한 마리가 후드득 창공을 향해 솟구치면서 내는 소리가 마치 회초리 소리같았다. 아직도 살아가는 길을 잘 모르냐고 어머니가 나를 향해 내리치는 일갈, 바로 그것 같았다.

마침 이날, 드라마 ‘정도전’에서 최영장군이 곳간에 쌀을 쌓아두고도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주기 아까워 몸을 사리는 중신들에게 일갈하는 장면이 나와서 그렇게 들렸는지도 모르겠다.

묘역 에움길은 서울에서 의주까지 이어지는 의주로에서 살짝 비켜나 있다. '양주 밥 먹고 고양 구실한다'는 속담 속 고양(高陽)터에 속해 있기도 하다.

이 길을 역사상 가장 뼈아프게 통곡하며 떠났던 사람이 선조다. 그는 무악재를 넘어 백성들의 원망을 뒤로 하고 의주 길을 따라 피란을 떠났다. 호위하던 병사들은 도망쳤고, 선조 수랏상도 내 것인양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돌을 던지고 침을 뱉고 주먹감자를 먹이는 사람들이 숱했다고 하니, 그 치욕은 뼈까지 갉아먹었을 것이다. 말년에 선조가 관절염에 시달렸다는데 이때문이 아닌가 싶다.

▲ 고양동누리길 종합 안내도. 딴 설명 필요없다. 구파발을 거쳐 오든 일산쪽에서 오든 필리핀 참전비에서 천변 따라 곧장 들어와 그림대로 한 바퀴 돌면 네비 찍는 것보다 편하다. 폐부까지 저려오는 산공기 마시며 돌다보면 한바탕 뛰어 논 것처럼 몸이 가볍다.

그런 길, 고양시 대자산에 위치한 최영장군 묘를 찾아가는 길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구파발에서 문산으로 가는 통일로를 쭉 따라 가다 필리핀 참전비에서 우측으로 난 천변길을 따라가면 된다.

아직도 매운 2월의 바람이 노루꼬리만큼이나마 남아있어서 그런지, 사람들 모습이 뜸하다. 단풍나무길이라 이름 붙인 그 길을 오른편의 매조산을 끼고 터벅터벅 걷다보면, 공릉천에서 넘어오는 먼지냄새가 골골한 삶을 꿰고 있는 옛 시골길을 떠오르게 한다.

길이 어수선하게 헝클어진 곳에 다다르면, 오른쪽으로 가라는 팻말이 주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세련된 자태로 서 있다. 그 길을 따라가면 좌측에 성령대군의 묘소가 보이고, 우측으로 허리춤을 죄면 구들방에서 내 부모형제의 체취가 묻어나올 것같은 시골집 두 채가 다소곳이 서있다. 그 반대편으로 소현세자의 아들 경안군과 손자 임창군의 묘가 보인다.

그 사잇길을 샛바람 맞으며 오르면 최영장군을 만날 수 있다. 사람 서넛이 걸을 만한 조금 가파른 등성길 옆으로는 밤나무들이 늘어서 굽어보고 있는데, 어딘가에서 본 풍경이다. 그러고 보니 그 길은 우리네 옛길이었다.

얼룩소 잔등이 같은 능선에 담긴 초가며, 동구 밖 서낭당, 퐁퐁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나락 찧던 방앗간, '느릅나무 밑의 욕망'을 연상시키던 큰 나무, 고샅길을 좇아 내달리던 그런 풍경과 추억이 있는 길 말이다.

▲ 용암사 쌍마애불. 굽어 내려 보는 기운이 따스했다.

길은 자신을 밟아주는 자가 있을 때 행복하다. 내가 오늘 이 길을 걷는 것은 몇백년 건너 온 시간을 되찾기 위함이다. 이 길을 가면서 최영장군은 흙의 말을 듣고 길의 말에, 자신의 억울함을 피처럼 토해 냈으리라.

가슴까지 차오르는 숨을 몰아쉬며 100개는 넘을 듯한 돌계단을 오르니 풍상을 견디며 대자산 중턱에 누워 있는 최영장군의 묘가 벽항궁촌 초가만 하게 앉아있다.

그곳에는 곧은 절개와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한 인간이 누워있다. 그는 영원한 고려인이었으며, 천생 무장이었다. 이성계에게 머리를 조아릴 수는 없었던 인간 최영은 죽음으로 구원받았다.

그 죽음은 길을 내는 일이었다. 자신의 길, 그리고 남겨진 자들이 향도삼아 가야할 그런 길 말이다. 길을 내기는 했지만 그라고 두렵지 않았을 리는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길을 내었던 것은 그것이 올바른 길임을 굳게 믿었기때문이리라.

화강암보다 견고한 것이 인간의 신념이다. 그것은 칼로도 총으로도 돈으로도 무너지게 할 수 없다. 오직 그 스스로 허물 때만 무너진다. 칼날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았던 최영장군은 그래서 아직도 충절의 신으로 가장 많이 모셔지는 신령 가운데 하나다.

최영장군에 대한 이야기나 일화는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을 직접 와보지 못한 사람들이 늘 궁금해 하는 일이 있다. 나도 그랬지만 ‘발초(發草)’ 문제다.

장군은 “내가 평생에 탐욕스러운 마음을 가졌다면 무덤 위에 풀이 날 것이요, 그렇지 않았다면 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말대로 그의 무덤에는 풀이 나지 않았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돼 있기도 하다.

정말인가? 정말인지 아닌지는 어느 때에 무덤을 방문하는가에 따라 달렸다. 늦가을이나 겨울, 그리고 초봄에 오면 풀이 말라있다. 이제 답이 됐으리라. 그런데 발초 문제보다 더 해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최영장군을 모시는 문무상의 코가 죄다 뜯겨 나가고 없는 것이다. 아들 낳기를 바란 여인네들 짓이라는 게 그 망측스러운 광경을 본 어느 행객의 넋두리지만, 말이 말을 낳아 “최영 장군은 코가 없다더라” 하는 엉뚱한 소문이 돌까 괜히 걱정이 된다.

그런 난장판 꼭두각시같은 생각을 하고 돌아서 내려오는데, 세한을 견딘 나무들의 큼지막한 몸뚱아리가 유난히 눈에 밟힌다.

내가 그 들머리로 들어서려 할 때
그는 삐닥하게 서 있거나 바람을 등지고 있었지
내가 한 걸음 발길을 옮기면
한쪽 오래된 오솔길로 숭숭 구멍난 숲이 보였다.
숲길 계단이 자리한 그곳에 발길을 멈추고,
사방을 둘러보는데
언제 나타난 그대가 떨어져 가거나 앞서 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고만고만한 거리에서 오래된 장작을 태우고 있었다.
그 외길목에는 자화상이 서러운 묘 하나가 앉았는데
나는 보다보다 목이 갈라지고 말았다.
몽롱하지만 몽롱해지지 않으려고
고개를 꼬는데
빗장은 털컥 소리 내며 오래된 오솔길에 걸렸다.
- ‘오래된 오솔길’, 졸시(拙詩)

▲ 마장 저수지. 윤관장군 묘에서 서울로 내려 오다 언덕길로 가면 만날 수 있다. 글에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산책로로 그만이다.

시를 한 수 짓고 나니 머리가 어찔했다. 누가 정신줄을 안드로메다에 놓고 왔냐고 물어도 할 말 없었다. 일찌감치 고달픈 여정을 미리 진단하고 나선 사람처럼 허기져 왔다. 식당을 찾았다. 마침 스쳐가는 길가에 일필휘지로 내갈겨 쓴 ‘칼국수, 밥 공짜’ 간판이 눈에 띄어 얼른 들어갔는데, 그 양이 어마어마하다.

뜨근한 국물은 칼바람이 섞어져 있어야 제 맛이 난다고 했던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하고 일어서니, 다시 움직일 맛이 난다. 찬바람을 따라하는 여정은 스스로를 부추겨야 뜨거워진다. 내 몸속의 열로 추위를 이기는 것이다.

지난해 10월말, 고양시는 한양에서 경기도를 거쳐 의주로 이어지는 의주대로를 바탕으로 한 도보여행길 의주길을 조성했다.

의주대로는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과 상인들의 애환이 살아 숨쉬는 곳이기도 하다. 박지원은 이 길로 중국을 건너가 ‘열하일기’를 저술했다. 의주대로를 통해 수입된 서구의 과학과 기술은 북학운동의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최영장군 묘에서, 길만 잘 안다면 산등성을 따라 봉우리 몇 개만 넘으면 바로 닿을 듯한 벽제관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인근 길은 아찔한 길이기도 하다. 1.21사태(청와대 습격사건)때, 박정희 대통령을 노리고 들어온 북한 게릴라부대의 김신조 일당이 침투해 온 길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제2사단의 방어선을 뚫고 임진강을 건너 이 지역 산들을 거쳐 북한산-청와대로 거침없이 들어왔다. 오싹하다. 그때 김신조 일당을 만나 시계까지 선물 받았던 나무꾼 형제는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뜬금없이 궁금해진다.

한양에서 의주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큰 역관 12개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조선과 중국을 오가는 사신들이 머물거나 능에 제사 지내러 가는 국왕이 숙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벽제관은 그 첫 번째 역관이었다.

지금은 터만 발라놓은 뼈다귀 모양 스산하게 남겨져 있으나, 역사의 간난신고가 심층에서부터 표피까지 끈질기게 움트려 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이곳이 한양으로 들어가려는 적들과 한판 대결을 펼치던 곳이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때 명의 이여송은 이곳 ‘벽제관 전투’에서 녹다운되기도 했다. 이곳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그 여세로 권율이 방어하던 행주산성으로 메뚜기떼처럼 몰려갔으나, 불난 화전밭으로 뛰어 들어간 꼴이 되었다. 권율장군 묘는 이곳에서 돌아서면 닿는 양주 장흥에 있다.

예서 발길을 통일로를 따라 북으로 꽤 멀리 옮겨가면, 광탄면 용미리(龍尾里)란 마을이 나타난다. 백두대간을 타고 내려온 용들이 한양 땅을 만들고 그 꼬리가 머물러 있는 고장이라고 해서 용미리라고 불렀다 한다. 이곳에는 용암사(龍岩寺)가 있으며 쌍마애불이 유명하다.

겨울해가 느릿하게 내려앉은 쌍마애불을 보러 그래도 사람들이 심심찮게 찾아온다. 절 마당에는 나이든 스님이 어떤 아낙과 조곤조곤 말을 주고받는데 그 모습이 정겹다.

정면에서 볼 때 좌측마애불은 둥근 보관을, 우측마애불은 사각보관을 쓰고 있는데 좌는 미륵불, 우는 미륵불을 경배하는 보살상으로 추정된다는게 어느 향토사학자의 말이다.

여기에는 고려 선종과 원신공주의 아들 탄생과 관련된 설화와 세조와 그 부인 정희왕후의 용화회 참석 이야기 및 이승만 대통령이 득남을 기도했다는 이야기들이 서려있다.

▲ 윤관장군 묘. 400년 산송(山訟)이 남긴 이야기는 외신에까지 보도됐다.

여정의 마지막은 왕비를 4명 배출한 파평 윤씨의 큰 어른, 고려시대 명장 윤관장군의 묘역이다. 용암사에서 지근거리에 있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입이 딱 벌어졌다. 풍만한 곡선이 푸르른 하늘과 맞닿아 어질어질하여, 왕릉인가 싶어 다시 눈을 비비고 보니 장군의 묘가 맞다. 좀 전에 보고 온 최영장군의 묘가 갑자기 초라해졌다.

묘역입구 좌측에는 ‘파평 윤씨 청송 심씨 화해기념비’가 자리하고 있다. 그 사연은 이 곳에 있던 윤관장군 묘가 풍상에 실전(失傳)되니, 영의정을 지낸 청송 심씨 심지원의 묘를 쓴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리하여 두 가문의 400년 산송(山訟)의 막이 올랐으나 나랏님도 어찌하지 못했다. 그러다 2008년 5월 심지원 묘를 비롯한 청송 심씨 묘역이 인근으로 모두 이장되면서 막을 내렸다. 이때 로이터 통신 등이 '조상묘 다툼이 400년만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고 보도할 정도였다고 하니 놀랍다.

봄을 이기는 겨울은 없다고 했다. 이제 겨울의 말미에 선 것 같다. 칼바람은 시베리아를 건너다 멈출 것이고, 남녘에서 불어오는 미풍은 여인들의 화사한 치마폭에 담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오던 길에 못 본 '연산군금표비'가 생각난다. 연산군이 사냥에 방해가 된다며 '금표내에 들어오는 자는 참한다'는 내용을 한자로 새겨 넣은 비석이다. 비는 그곳에 새겨진 글로 역사를 재현한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금표비에도 봄바람이 불어와 헛헛했던 연산의 마음을 따스하게 채워 주려는지 갑자기 사방이 고즈녁해지고 마파람이 먼지를 일으켜 세운다. 2월 하순의 기행은 상혜를 걷는 연산의 아슬아슬함과 다름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