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6·25전쟁 72년...'16개 UN참전국 연천지역 전투 되돌아보다'
[특집] 6·25전쟁 72년...'16개 UN참전국 연천지역 전투 되돌아보다'
  • 김명호 기자
  • 승인 2022.06.26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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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 평화도시 위상 제고 위해 ‘6.25 전쟁 UN 참전국 역사자료 조사 연구 최종보고서’ 발표
영국·터키·태국·네덜란드 등 16개 UN 참전국 군대 모두 연천서 전투 벌인 역사적 자료 수집
태국 사진.(사진 = 연천군)
태국 사진.(사진 = 연천군)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비극인 6·25전쟁(한국전쟁)이 발발한지 72년이 지났다.

세계인은 물론 한국인에게 조차 기억 저편으로 점점 희미해져 가는 6·25전쟁, 그러나 여전히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분단돼 있고, 잊힌 전쟁의 비극 또한 진행 중이다. 세월이 흐를수록 6·25전쟁 참전용사들이 영면하면서 전쟁을 기억하는 이들도 속속 사라지고 있다.

경기도 연천군은 이같은 상황에서 6·25전쟁 등에 대한 올바른 역사의식을 확립하고 평화도시 연천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미비했던 연천 및 6·25전쟁 관련 역사 자료를 정리했다. 16개 UN 참전국가 군대의 연천지역 활동상을 집대성한 것이다.

연천은 6·25전쟁 당시 16개 UN참전국 군대가 모두 전투를 치렀던 유일한 지역인 만큼 역사적 의의가 크다.

연천관내 UN 참전국의 주요 전투를 보면 1951년 4월 장승천 전투(터키), 1952년 10월 고왕산 전투(캐나다), 1952년 11월 폭찹고지 전투(태국), 1953년 3월 불모고지 전투(콜롬비아) 등이 있다. 군의 최종보고서는 6·25전쟁 16개 UN 참전국 군대가 모두 연천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역사자료를 확인하고 수집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UN 참전국의 연천지역 전투를 돌아보며 잊혀 가는 6·25전쟁을 살펴본다.

△ 캐나다군의 고왕산(355고지) 전투.

캐나나군. (사진 = 연천군)
캐나나군. (사진 = 연천군)
캐나나군. (사진 = 연천군)
캐나나군. (사진 = 연천군)

캐나다 제25여단은 1952년 6월 30일 사미천 좌우안 일대의 방어진지를 영연방 제28여단에 인계하고, 이후 와이오밍 선과 캔사스 선상의 예비진지로 이동했다.

이후 원당리 일대에 주둔하면서 영연방 제1사단의 유일한 보급로인 임진강 교량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던 중 1952년 8월 초 영국군 제29여단과 임무를 교대하며 전선에 다시 투입됐다.

이때 캐나다 제25여단의 전투편성은 우측의 캐나다 경보병연대 제1대대가 고왕산 355고지 좌단부터 고잔리 128고지 좌단을 점령했으며, 미 제3사단과 임진강 좌안에서 연계했다.

그러던 중 10월 23일 새벽 캐나다 제25여단 정면 227고지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국군이 대대적인 포격을 시작했다. 적의 포격이 시작되자 캐나다 제25여단과 영연방 제1사단 포병부대가 즉시 대포병사격을 실시했으나 아군 355고지에 대한 적의 포격은 더욱 강해졌고, 오후부터는 227고지와 355고지 일대에 집중적인 포격이 가해졌다.

적의 집중적인 포격이 종료되던 18시경 대규모 적 병력에 의한 정면 공격을 예상한 B중대장은 즉시 중대원들에게 전투 준비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했다. 그리고 B중대장의 예상대로 18시가 넘어서자 중국군 병력들이 고왕산 355고지를 향해 돌격했다. 고왕산 정상에서 방어작전을 지휘하던 B중대장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적과의 직접 대결은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뒤 즉시 중대원을 이끌고 A중대 지역으로 철수했다. 이후 이러한 상황을 제1대대장에게 보고했다.

이와 같은 355고지 전투 상황을 보고 받은 제1대대장은 즉시 대대 예비인 D중대를 A중대와 B중대가 집결한 장소로 보내 355고지를 다시 탈환하도록 지시했다.

이처럼 제1대대 3개 중대 병력이 집결된 이후 시작된 캐나다 제25여단의 반격은 10월 24일 짧은 공격준비사격과 함께 시작됐다. 영연방 제1사단의 포병화력과 전차 등이 총동원되어 고왕산 355고지 좌단부터 227고지 우단에 이르는 지역을 집중포격 했고, 이어서 3개 중대 병력이 두 방향에서 355고지를 향해 돌격했다. 355고지 정상 부근에서는 중국군과 백병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수적으로 우세한 캐나다군이 중국군을 제압하고 355고지를 탈환하는데 성공했다.

캐나다연대 제1대대의 공격과 방어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됐지만 이 전투에서 캐나다군 전사 18명, 부상 35명, 포로 4명이라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 콜롬비아군의 연천지역 전투.

콜롬비아군. (사진 = 연천군)
콜롬비아군. (사진 = 연천군)
콜롬비아군. (사진 = 연천군)
콜롬비아. (사진 = 연천군)

콜롬비아군 대대가 연천지역에서 활동했던 시기는 1953년 3월 초였다. 미 제7사단에 배속된 콜롬비아군 대대는 정전협정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과정에 격전지인 서부전선의 연천지역 우측부대에 배속됐는데, 1952년 말 연천 북방의 서부전선으로 이동한 콜롬비아군은 6·25전쟁에 참전한 이후 경험했던 전투와는 전혀 다른 초진지 공방전에 참가했다. 당시 연천 북방의 전선은 미 제7사단과 대치 중이던 중국군이 역곡천 남안에 2개 사단을 배치해 주진지를 보강했다.

특히 자신들의 전초진지를 남하하기 위해 유엔군이 전초진지로 점령한 에리고지, 아스날고지, 폭찹고지, 불모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집요하게 공격했다. 이와 같은 서부전선의 전초진지 작전에 투입된 콜롬비아 대대는 제임스타운선 인근에서 약 7개월간 정찰 및 기습작전 등을 수행했다. 콜롬비아군은 스맥 작전 지원, 바브라 작전, 불모고지 전투 등을 통해 활약했다.

콜롬비아 대대는 180고지에서 격전을 치른 지 이틀 만인 1953년 3월 12일 불모고지를 담당하고 있는 미 제7사단 제31연대의 중앙지역으로 이동했다. 이때 콜롬비아 대대가 인수한 불모고지는 역곡천 남쪽의 감제고지였다. 아군이 적의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전초기지로 사용하고 있는 중요한 지형지물이었다.

콜롬비아 대대는 중국군이 통상 아군의 부대 교대 시점의 취약점을 이용해 공격해왔다는 것을 파악한 상태에서 부대 교대를 시작했다. 아군의 예측대로 중국군은 정확하게 부대 교대 시간에 맞춰 작전지역 전역에 걸쳐 포격을 시작했다. 아군의 혼란을 노린 중국군은 1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투입해 불모고지 정면을 압박하며 공격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기습을 당한 콜롬비아 대대 A, B중대는 즉시 수세로 전환해 참호와 벙커에 의지해 돌격하는 적의 공격을 저지했다. 밀고 밀리는 싸움을 이어가던 콜롬비아 군대는 결국 중국군의 저항으로 정상탈환에는 실패하지만 이 전투에서 콜롬비아군은 미군과 더불어 600여 명의 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다만 이 전투에서 콜롬비아군은 전사 95명, 부상 97명, 실종 30명 등의 인명손실을 입었는데, 이는 콜롬비아가 6·25전쟁에 참전한 이후 단일전투에서 얻은 가장 큰 손실이었다.

△ 터키군의 장승천 전투.

터키군 부상 당한 병사. (사진 = 연천군)
터키군 부상 당한 병사. (사진 = 연천군)

1950년 말 한국에 도착한 터키 여단은 현지 적응훈련을 통해 한반도 지형에 적응하고 중국군의 전술을 학습해 대응책을 마련했다. 이후 전선에 투입된 터키 여단은 미 제25사단에 배속되어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터키 여단이 연천지역에서 활동했던 시기는 다른 유엔 참전국 군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짧았다.

1951년 4월 22일부터 이틀 간 지속된 장승천 전투는 중국군 제5차 공세 당시에 터키 제1여단이 연천 동북방 5km 지점에 위치한 장승천 전방에서 중국군 제60군 예하 부대의 파상적인 공격을 격퇴하기 위해 치렀던 방어전투였다. 1952년 2월 중부전선의 김량장 전투에서 승리했던 터키 제1여단은 배속된 미 제25사단과 함께 유엔군의 반격작전에 참가해 북진했다.

특히 1951년 4월 초에는 캔사스선까지 진출했다. 국군과 유엔군이 중국군의 제3차 공세와 4차 공세를 극복하고 38선을 향해 진격하는 동안 중국군은 38도선 북쪽으로 철수해 후방에 병력과 물자를 집결시키고 있었다. 또한 중국군은 유엔군이 점차 38도선을 넘어서 진격하자 1951년 4월 또 한 차례의 대규모 공세를 시도해 일시에 전세를 역전시키려고 했다.

중국군의 의도를 간파한 미 제8군사령부는 캔사스선을 강화하되 이를 안전하게 방어할 수 있도록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과 중부전선의 미 제9군단을 더욱 진출시켜 연천~고대산~와수리~화천저수지를 연결하는 새로운 통제선 와이오밍선을 점령하려 했다.

미 제25사단에 배속된 터키 제1여단은 1951년 4월 5일부터 와이오밍선을 목표로 공격을 재개했다. 하지만 불과 2주 후인 4월 22일부터 중국군이 제5차 공세를 시작함에 따라 즉시 연천과 철원 사이의 도로 우측 장승천 일대에서 방어로 전환했다.

특히 터키 제1여단 예하 정찰대가 4월 22일 오전에 중국군 포로 1명을 생포했으며, 그로부터 오후 8시 중국군의 대공세가 시작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중국군의 5차 공세는 1951년 4월 22일 야간에 시작됐다. 강력한 공격준비 포격을 앞세운 중국군의 대규모 공세는 초기부터 서부전선 전체에서 압도적인 병력을 앞에숴 밀고 내려오는 양상으로 전개됐다.

철원과 연천 중간에서 진격을 멈춘 미 제25사단 예하 터키 제1여단은 적에 비해 수적인 열세인 상태에서 급편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이 방어진이에 의존해 강력하게 밀고 내려오는 중국군에 맞서 싸웠다. 4월 22일 자정 즈음에 비로소 터키 제1여단의 긴박한 상황을 파악한 미 제25사단장은 터키 여단에게 즉시 한탄강 남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터키 여단은 적에게 포위된 상황에서도 포위망을 뚫고 성공적으로 철수에 성공했다.

[신아일보] 연천/김명호 기자

kmh@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