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태어난 것을 억울해 하지 않으려면
이 땅에 태어난 것을 억울해 하지 않으려면
  • 신아일보
  • 승인 2014.04.23 13: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무책임’ 때문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나라
참사 되풀이 않으려면 근본부터 뜯어 고쳐야

세월호 침몰 참사 후 온 국민이 집단적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뉴스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고 시신 인양 장면을 차마 못보겠다는 이도 있다.

사망자가 추가로 확인될 때마다 허탈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어린 학생들이 참담한 상황에 놓인 것에 대한 집단적 죄책감이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는 것이다.

어른답지 못한 죄책감에 더해 무능.무책임 정부에 대한 불신과 분노가 치솟고 있다.

세월호 침몰사고 대응 과정에서 국민은 안중에 없고 대통령만 바라보는 공직자들의 일그러진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에 대통령 1인만 있고 책임지고 일하는 공무원은 보이지 않는다는 탄식이 실종자 가족은 물론 국민사이에도 커지고 있다.

해양수산부장관이 지난 17일 낮 진도를 방문한 대통령에게 승선자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고 보고했지만 실제로는 그날 밤까지 전체 명단을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판명됐다.

실종자 가족과 대통령이 보는 앞에서 부실보고를 한 셈이다.

그뿐 아니다. 안전행정부 국장은 실종자 명단 앞에서 기념촬영을 시도하다 거센 항의를 받았고 교육부장관은 실종자 가족들이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고 있는 진도 실내체육관에서 혼자 식사를 하는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여기에 정치권까지 가세해 여당의 최고위원이라는 인사가 쌩뚱맞게 '종북타령'을 해 여론의 뭇매를 맞기도 했다.

이 같은 고위공직자들의 한심한 행태는 며칠째 선체에 갇혀있는 실종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은 안중에 없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다.

세월호 침몰 현장에 전문성을 갖춘 공무원이 투입되지 않아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목격됐다.

일부 공직자들이 괜히 나섰다가 잘못되면 책임만 진다는 생각 때문에 위험한 상황일수록 몸을 사리는 작태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일이 끝나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고에 대한 대응체계를 보더라도 안행부, 해수부 등 관계부처와 군.경이 합동작업을 하면서 형식적으로는 총리가 책임자로 돼 있지만 실제는 어느 부처도 책임을 지지 않는 이상한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다.

전문성을 갖춘 책임자들이 현장에 없다보니 정보가 부족한 실무자들이 자꾸 작은 거짓말을 하면서 큰 거짓말을 만들어 내고 있는 양상이다.

정부차원의 대책회의도 현장특성을 전혀 반영하지 못한채 알맹이 없는 상황보고로 겉돌기 일쑤이다.

이처럼 정부차원의 대책회의가 헛돌지 않고 적절한 대응책을 내놓기 위해선 과도한 1인 리더십에서 벗어나 전문가 중심의 위기관리시스템이 복원돼야 한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대통령이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챙기게 되면 결국 시스템이 움직이지 않게 된다.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사고현장을 찾아 실종자 가족을 위로한 것은 그 자체로서는 잘한 일이지만 더 우선해야할 것은 국정 시스템이 잘 돌아갈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이다.

역대 대통령 가운데 대형사고 초기 단계에서부터 피해자 가족들을 만나 요구사항을 듣고 정부당국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등 현장지휘에 직접 나서는 경우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렇게 되면 시스템이 움직이지 않고 공무원들은 자꾸 위만 쳐다보게 된다.

국정업무에는 윗사람이 해야할 일이 있고 실무책임자들이 해야할 일이 있다.

잠수부들은 목숨을 걸고 바닷속으로 뛰어드는데 공무원들은 대통령 앞에서만 일하는 척 하지는 않는지 국민들은 지켜보고 있다.

국민은 보지 않고 대통령만 보고 일하는 공무원이 버티고 있는 한 대한민국 국민들은 불신과 분노의 트라우마에서 헤어나기 어렵다.

부실한 제도, 무책임한 행정, 엉터리 재난대응 체계, 스스로는 책임지지 않는 권력, 이 때문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는 영령들이 너무 많다.

이 땅에서 태어난게 억울하고, 이 땅에서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 무섭고, 이 땅에서 국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두렵다면 그 책임을 누가 질 것인가.

세월호 참사 같은 억울함이 다시는 없도록 하려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잘못된 것 모두를 뜯어 고치는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