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없는가
이 땅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없는가
  • 신아일보
  • 승인 2014.04.23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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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선 선진사회만들기연대 편집위원

▲ 이도선 선진사회만들기연대 편집위원
일전에 벗들과 봄나들이로 경주를 여행했다. 빼어난 산수와 맛깔스런 음식도 좋았지만 도시 전체가 문화재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곳곳에 산재한 유적과 유물, 그리고 거기에 스며든 사연들 덕분에 눈과 귀가 모처럼 호강했다. 역시 ‘천년왕도(千年王都)’였다. 국보 제188호 천마총의 유물 일체를 발굴 41년 만에 일반에 처음 공개하는 특별 전시회 '천마, 다시 날다'가 때마침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열린 것은 망외의 횡재였다.

비록 신라의 유적은 아니나 말로만 듣던 경주 교동 최 부잣집을 방문한 것도 못지않은 감흥을 자아냈다. 흔히들 부자는 3대(代)를 못 간다지만 최 부잣집은 1600년대 초부터 해방 직후에 이르기까지 12대에 걸쳐 지속됐다. 그러나 최 부잣집이 유명한 것은 만석지기 재산을 남보다 오래 지켜서가 아니라 진정한 부자의 표상을 우리에게 제시했기 때문이리라.

최 부잣집의 가훈인 ‘6훈(六訓)’을 읽어 내려가면 누구나 마음이 숙연해진다.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마라, 만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온 며느리는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높은 벼슬과 지나친 부를 경계하고 검약을 미덕으로 여기며 이웃과 더불어 살려는 결연한 의지가 절절히 배어난다. 걸핏하면 민중의 지탄이나 받는 요즘 사회지도층과는 극명히 대비된다.

‘황제노역’ 사건은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실종된 이 시대의 서글픈 자화상이다.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인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의 1심 형량을 2심에서 2년6월과 4년으로 낮춘 것은 그렇다 쳐도 벌금을 508억 원에서 254억 원으로 반 토막 낸 것은 이해가 안 된다. 게다가 벌금을 안 내고 교도소에서 몸으로 때우는 제도를 활용해 하루에 5억 원씩이나 깎아 주다니! 일반인의 5만~10만 원과는 그야말로 천양지차여서 ‘법 앞에 만인이 평등하다’는 법언(法諺)이 무색해진다.

이런 몹쓸 판결을 내리고도 탈 없이 광주지법원장까지 오른 문제의 법관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마지못해 사표를 내면서도 끝내 뉘우치지 않았다. 그저 "국민의 생각과 눈높이에 대한 통찰이 부족했음을 깨달았다"며 궤변을 늘어놓았을 뿐이다. 사법부 수장인 대법원장이라도 나서서 국민에게 사죄했어야 하나 아무런 징계도 내리지 않은 채 사표 수리로 끝냈다. 두루뭉수리로 넘어가기는 허 전 회장에 대한 선고유예를 재판부에 요청했던 검찰도 매한가지다.

사회 정의의 보루인 법원과 검찰이 이럴진대 ‘탐욕의 화신’인 재벌은 안 봐도 뻔하다. 올해 처음 공개된 연봉 5억 원 이상 등기임원의 내역을 보니 건전한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수두룩하다. 기업 실적이 형편없어도, 공금을 빼돌려 회사에 큰 손실을 끼쳤어도, 재벌총수들 연봉은 여전히 난공불락이다. 막대한 배당금은 물론 별개다. 지난해 300억 원을 유용한 혐의로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도 연봉과 배당금으로 300여억 원을 챙겨 추징금을 단숨에 복구한 담철곤 오리온 회장 일가가 그런 예다. 순익이 25억 원밖에 안 되는 계열사에서 151억 원씩이나 받아낸 대목에서는 어안이 벙벙해진다.

일감 몰아주기로 비상장회사의 기업가치를 높여 재산을 손쉽게 불리는 한편으로 연봉과 배당금을 뭉텅이로 떼어 가는 것도 이들의 애용 수법이다. 지난해 순익이 8억 원도 안 된 광영토건에서 100억 원이나 배당받은 이중근 부영그룹 회장은 수많은 사례의 하나일 뿐이다. 이 정도면 말이 좋아 재벌총수지 실상은 소액주주와 임직원 등쳐먹는 좀도둑과 진배없다. 삼성그룹 이건희-재용 부자를 비롯한 상당수 재벌총수가 비등기이사로 빠져 연봉 공개를 회피한 것도 영 마뜩잖다. 많은 일자리를 창출하며 성장을 주도하는 재벌들이 욕먹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한마디로 철학의 부재다.

1970년대 미국 자동차 ‘빅3’인 크라이슬러가 도산 위기에 빠지자 경쟁사 포드의 사장 출신인 리 아이어코커는 회장으로 취임하며 연봉을 단 1달러만 받겠다고 선언했고 회사는 지도자의 솔선수범 덕에 거뜬히 살아났다. 미국에선 지금도 ‘연봉 1달러 신화’ 대열에 합류하는 최고경영자(CEO)가 곧잘 나온다. 미국 부자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상속세 폐지에 반대하고 소득세를 더 내겠다고 자진해서 나서는가 하면 사후에 재산의 절반을 기부하겠다고 서약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다.

이쯤은 돼야 사회지도층이라 할 만하다. 황당무계한 황제노역이나 턱없는 연봉으로 국민의 입에서 분노와 절망의 탄식이나 나오게 해선 안 된다. 우리 사회지도층도 이젠 달라져야 한다. 그들에게 최 부잣집 6훈을 읽고 앞으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를 진지하게 성찰해 보기를 강추한다.

 

이 글은 선진사회 만들기 길라잡이‘선사연’의 홈페이지(www.sunsayeon.or.kr)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