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주도한 김옥균의 출생지 논쟁
갑신정변 주도한 김옥균의 출생지 논쟁
  • 신 상 구
  • 승인 2012.09.13 13: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구한말 목숨을 걸고 1884년 고종 21년에 갑신정변을 주도하고‘한국 근대화를 빛낸 선각자’로 높이 추앙받고 있는 고우(古愚) 김옥균(金玉均) 선생이 타계한지 118년이 지난 지금 그의 출생지에 대한 논쟁이 끊이질 않고 계속 벌어지고 있다.

지난 2012년 6월 2일 토요일 오후 대전광역시 동구의 역사와 문화 실체를 알아보기 위해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은진송씨(恩津宋氏) 집장촌을 찾아 학술조사를 하는 도중, 김옥균의 출생지가 이사동이라는 안내간판을 우연히 보고, 나는 정말로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까지 충청남도와 공주시가 충남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골 38번지를 김옥균의 출생지로 보고, 각종 기념사업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충청남도는 1976년 12월 6일 김옥균 생가지인 광정리 감나무골 38번지를 충남 기념물 제13호로 지정하여 공표하고, 공주시에서는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골 38번지에 유허비를 건립하고 안내판까지 건립하여 놓았다.

그리하여 나는 이사동 135-2번지에 거주하고 있는 송진국(69세)씨 댁을 방문하여 사우당효정공파종중(四友堂孝貞公派宗中)이 1984년 3월 대전 회상사(回想社)에서 발간한 족보인『은진송씨효정공파보 전(恩津宋氏孝貞公派譜 全)』을 잠간 빌려보았는데, 분명히 30페이지에 ‘김병태 자 김옥균 문과호조참판(金炳台 子 金玉均 文科戶曹參判)’으로 기록되어 있어 김옥균의 출생지가 대전시 동구 이사동 윗사라니 음지뜸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족보 22페이지에 김옥균의 외조부인 송인덕(宋潤德, 1791-1822)이 이조참판을 증여받았다는 사실과 외숙인 송인식(宋寅植, 1818-1900)이 선비라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으나, 김옥균의 생모는 ‘은진 송씨(恩津宋氏)’로만 기록되어 있어 성함을 확인할 수 없었다.

한편 『은진송씨효정공파보 전(恩津宋氏孝貞公派譜 全)』에는 분명히 김옥균의 출생지가 대전시 동구 이사동 윗사라니 음지뜸으로 되어 있고,『안동김씨대동보(安東金氏大同譜)』5권에는 김옥균의 생가지가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38번지로 기록되어 있어 서로 상이한데, 왜 이제까지 김옥균의 출생지를 정확하게 바로잡지 않았는지 궁금하여 대전 동구문화원에서 2006년에 발간한 한상수 저『은진송씨 집장촌 이사동』 김옥균 편을 찾아보았다.

청주대 국문과를 거쳐 단국대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대전대 국문과 명예교수로 있는 한상수(韓相壽) 선생은 그의 저서에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결혼 초에 남자가 1년 또는 2-3년간 처가살이 하는 풍습인 서류부가제도(?留婦家制度)가 있어 김옥균의 생부 김병태가 이사동 윗사라니 음지뜸의 안산 모랭이 산 아래 위치했던 처갓집인 송인식(宋寅植)의 집에서 결혼 초에 처가살이 할 때인 1851년 1월 23일에 김옥균이 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행정체제를 갖추지 않아 출생지는 별로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오늘날과 같이 출생한지 21일 이내로 출생신고를 해야 하는 제도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출생 장소를 구체적으로 기록해 두지 않았다.

다만 반상(班常)을 구별하기 위해 조선시대 인물에 대한 각종 기록을 보면 시조의 고향이 되는 관향(貫鄕)만 표기했다.

게다가 조선시대는 유교의 영향을 받아 부계중심사회였기 때문에 신생아의 본적지는 아버지의 본적지를 따르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제까지 김옥균의 생가지가 대전광역시 동구 이사동 윗사라니 음지뜸임에도 불구하고 아버지 김병태의 본적지인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감나무공 38번지로 잘못 기록된 것 같다고 하였다.

아무튼 앞으로 빨리 역사학자들의 정확한 고증에 의해 김옥균의 생가지가 확실하게 밝혀져 더 이상 불필요한 ‘김옥균 생가지 논란’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