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자랑스러운 곳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자랑스러운 곳
  • 유 재 란
  • 승인 2012.04.09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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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국민에 대한 책임을 갖고 주어진 업무에 충실할 것을 선서하며 동두천시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한지 어느덧 4년이 지났다.

필자는 가끔 내가 일하고 있는 이곳 ‘동두천’의 의미가 궁금했다.

동쪽의 콩밭이 있는 냇가? 그냥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따뜻한 봄기운이 느껴지는 지난 휴일 우리 가족은 귀농해서 연천에 살고계신 존경하는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막걸리와 들에서 캔 나물을 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선생님께 동두천의 의미를 아시냐고 여쭈어 보았다.

동녘동(東)은 나무와 그 위에 걸친 태양의 형상, 콩두(豆)는 곡식 중에 제일인 콩, 내천(川)은 고대부터 중요시되어 온 물을 이 모든 것을 조합해서 만든 명칭이 바로 동두천이라는 것이다.

농경시대부터 가장 중요시 되어왔던 태양과 나무, 콩과 물 모든 좋은 환경을 갖춘, 사람과 자연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뜻을 가진 좋은 곳이라 했다.

이외에도 동두천시가 역사적으로 얼마나 가치가 있는 곳인지도 듣게 되었다.

지난 4년을 근무하면서도 이런 좋은 뜻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조금은 부끄러웠다.

동두천에 잠시도 살아본 적이 없는 선생님이 동두천시를 가치 있게 보고 있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우리 고장인 동두천에 국모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조선의 마지막 비운의 황후인 순정황후 윤비는 1894년 동두천시 불현동 동점마을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사려 깊고 총명했던 윤비는 13세의 어린나이로 태자비가 됐다.

입궁한지 60년 동안 망국의 한과 일제통치하의 설움, 해방 후 20년 동안 파란만장한 생애를 보냈으며 낙선재에서 생애의 막을 내렸다.

윤비는 어전회의에서 순종에게 한일합방을 꾸준히 주장하는 친일파들의 이야기를 병풍 뒤에 숨어서 엿듣고 옥새(국새)를 자신의 치마 속에 숨기고 내놓지 않았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한일합방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일제의 앞잡이 이경모를 앞세워 동점마을 토지를 전부 매입하고 1945년 해방을 앞둔 시점에서 윤비의 생가를 모두 헐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제는 흔적을 찾아볼 순 없지만 우리는 그분을 기억하고 흔적을 찾으려고 노력해 봐야하지 않을까. 또한 지금의 동두천중앙역은 어수동역으로 불리었다.

어수란 지명은 왕좌에서 물러나 함흥으로 가던 이성계가 물을 마신 곳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이성계가 물을 마시고 그 물 맛이 기가 막혀 내친김에 며칠 머물고 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또 태조 이성계가 두 아들을 잃은 슬픔에 소요산 소요사 아래에서 먼저 간 어린 세자와 사위의 명복을 4년 3개월간 빌었다는 이성계의 별궁도 역사의 고증을 통해 전해오고 있다.

하지만 현재는 몇 개의 석축만 남아 있을 뿐이다.

시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지금, 우리는 동두천시의 역사를 되짚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역사는 후손에게 자부심과 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준다.

따라서 동두천시도 더 많은 역사를 발굴해 자라나는 청소년들과 시민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와 문화의 도시라는 것을 알려야 한다.

단순이 이곳에 산다는 이유로 ‘내 고장은 좋은 곳이에요’ 가 아니라 내가 먼저 이곳을 알고 내가 느껴야 무엇이 좋은지를 사람들에게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