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백장군
계백장군
  • 박 태 건 국장
  • 승인 2011.07.28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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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호국 정신으로 지칭되는 옛 인물 중 백제시대 계백장군을 꼽을 수 있다.

삼국시대 위기에 처한 조국 백제를 구하고자 신라의 5만 대군에 맞서 죽음을 각오한 5천 결사대를 이끌고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계백장군은 백제가 위기에 빠지자“살아서 적의 노비(奴婢)가 됨은 차라리 죽은 것과 같지 못하다"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여 비장한 결의를 보였다.

신라의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나 격파했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의 장군 품일(品日)은 16세의 어린 아들 관창(官昌)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였으나 백제군에 생포되었다.

계백은 어린 나이의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재차 나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다.

계백은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이를 본 신라군은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했고 계백은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조선시대 문신.학자인 서거정은 계백장군을 “나라와 더불어 죽은자"라 칭송했다.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연산리·표정리·관동리·송정리 일대의 넓은 들이 황산벌 싸움의 격전지라 알려져 있다.

인근 충장산 남쪽 기슬기에 계백장군의 묘소가 있으며 이곳 지명이 가장(假葬)골이다.

또한 주변에 개선부리라는 곳이 있고 계백장군의 통솔지인 솔부리 인근에 장군의 애마가 묻힌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충곡리에는 충곡서원이 있는데 황산벌 한가운데 야트막한 산 계곡에 자리잡고 있다.

충곡서원에는 대부분의 서원들이 문인들을 주향으로 모신 반면 이곳에는 계백이라는 무인을 주향으로 모시고 있다.

최근 그를 소재로 한 MBC 드라마‘계백'이 방영되고 있다.

나라의 흥망성쇠를 고민하는 계백장군의 기개와 애잔함을 엿볼수 있어 인기를 끌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