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의 날, 이대로 좋은가
보은의 날, 이대로 좋은가
  • 김 상 현
  • 승인 2011.05.03 1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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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은 푸른 하늘 길 따라 미풍이 강을 건너고 언덕을 넘어 연한 초록빛으로 땅을 물들이며 어느새 우리곁에 성큼 다가 온 계절의 여왕 이기에 보은의 달이라 할 만큼 은혜나 사랑을 기리는 날이 많다.

보은의 날 5일은 어린이날에 8일은 어버이날, 10일은 석가탄신일, 15일은 스승의 날, 16일은 성인의 날 등이 5월에 다 모였다.

특히 10일(음 4월 초8일)은 인간정신을 일깨운 부처님 오신날 이다.

이같이 숱한날을 정해 놓고 인간들의 이성적 근원을 삼았다.

그러나 어린이 날에 생활고에 못이겨 자식까지 동반하여 자살한 비정의 부모가 있는가 하면, 어버이날에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늙은 부모를 폭행하는 패륜아가 있고 스승의 날에 선생을 구타하는 배은망득한 불량아가 있다.

또한 성인의 날에는 차세대에 시대와 역사를 책임질 어른으로서의 자긍심과 책임감을 통감하기 보다는 술이나 마시고 정신이 흐려져 행패를 부리고 지나친 애정행각으로 주위에 눈총을 받는 그릇된 사고로 행동하는 것이 이 시대의 풍속도다.

그러므로 제도나 법률이 결코 인간을 완전하게 다스릴 수 없다는 증거다.

제도는 반드시 도덕적인 바탕에서 이뤄져 도적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만약 그렇지 못할 때는 차라리 제도가 없는것 보다 못하다.

어린이 날은 아무리 잘못을 저질려도 꾸중을 하지 않는 날인줄 안다.

이날만은 모든 요구를 다 들어 주고 하느님처럼 받들만큼 신성시 한다.

그것은 결국 이기적이고, 독선적이고, 교만하고 방자한 아이를 만들뿐 아무런 도움이 못된다.

어쩌자고 이런식으로 끌고 가는가. 적어도 건전한 사고라면 어린이날을 선포한 이유와 사랑하는 뜻을 일깨워 주어 올바르고 튼튼하게 자라기를 바라면서, 이 나라 이민족의 영광을 책임질 훌륭한 미래의 일꾼이 되도록 교육을 시켜야 한다.

어버이날도 매한가지다.

복잡한 산업사회에서 아파트 문화가 판을 치는 핵가족 사회에서 차짓 소원하게 될 부모님을 위해서 하나의 경종으로 정한 날이다.

사실이지 우리에게 왜 어버이날이 필요한가. 부모의 은공을 생각하면 365일 모두가 보은의 날이고, 자나깨나 매일 어버이 날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쩌려고 이날을 정해놓고, 그 흔한 카네이션 꽃 한송이를 달아 주는 것만으로 책임의 한계를 정하려 하는가. 물론 그 꽃 한송이도 달아 주지 못하는 지지리도 못난 자식도 있다.

이와 같이 형식적인 제도는 도식적인 모순에만 그치는게 아니라 더 큰 범죄를 저지르는 과정이 될 수도 있다.

가령 시간적 여유가 있는 데도 어버이 날에 찾아가 뵙겠다고 미루다가 그것이 도를 지나 아주 보기 싫다는 식으로 양로원에 보내지 않는다고 어느 누가 장담할 것인가. 스승의 날도 그렇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학생이 선생을 폭행하는 판국에 무슨 염치로 이날을 고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것도 철없는 학생들의 짓이 아니라 명색이 지성인을 수업하는 대학생의 행동이다.

그 학생이 외 그렇게 되었는가? 물론 일차적인 책임은 이성이 빈곤하고 포악한 성격을 가진 학생 탓이다.

그러나 그러한 학생을 길러낸 선생 스스로의 무능과 책임은 면하기 어렵다.

항간에는 대학의 두가지 형태의 어용 교수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정부의 시녀 역활을 하는 어용 교수가 있고 또하나는 학생들의 눈치를 살피며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충동질이나 하는 어용 교수가 있다고 한다.

이렇듯 어용 교수가 있는 세상에 참스승과 참학생이 드물다.

더구나 존귀한 스승의 자리를 포기하고 노동자를 자처하는 현실에 과연 스승의 날이 필요한가. 착각인지는 모르지만 제도가 제도 다운 참 뜻을 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어버이날이나 스승의 날을 이대로 두는게 좋은 가를 심도있게 검토 할 때다.

그 검토 자체가 하나의 충격이 되어 밀도있는 보은의 내실화에 기여할 수 있게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