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 민주革命, 그날의 함성
4.19 민주革命, 그날의 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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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4.22 1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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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19일 피 끊은 민주혁명의 함성이 폭발한지 어언 반세기가 흘렸건만 아직도 그날이 다가오면 뜨거운 피가 용솟음치며 가슴이 벅차오른다.

4.19혁명은 5천년 조국과 민족사의 헌법정신이 된 4.19혁명 이념‘자유 민주 정의’국가의 새 역사의 기틀을 마련한 이념 혁명이다.


4.19혁명이 위대한 민족의 국민 혁명임은 세계사에 자유와 공산권의 2대 혁명인 불란서 시민 혁명과 소련의 볼셰비키 혁명 차원을 초월한 즉 ‘정권찬탈’의 이념 혁명인 것이다.

우리가 이룩한 4.19‘자유 민주 정의’ 혁명은 조국과 민족사에 가치관의 목표로 추구될 것이며 미래 세계에서도 숭고한 ‘혁명의 귀감’으로 인류사에 영원히 빛날 것이다.


1960년대 자유당은 이승만 초대대통령을 국부적(國父的)존재로 온 국민이 추앙한 자유당을 조국의 자유민주 헌법이나 시대의 변화 그리고 새로운 근대국가 진료를 망각한 채 이조 왕정시대의 제왕으로 추종하면서 2인자 이기붕의 정권승계 음모와 야당의 언론 그리고 학원 탄압의 방편으로 자유당의 정치깡패와 폭력을 독재방법으로 사용하여 드디어 1960년 3.15 부정선거를 저질렀다.

이것이 앞서 말한 시대적 변화나 조국의 근대국가 진로 그리고 언론 탄압(경향신문 폐간조치)에는 자유 민주 헌법치하 애국심과 정의감에 상극되는 정치형태로 4.19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통령을 뽑는 3.15부정 선거가 부정으로 드러 나면서 경남 마산에서 대규모 규탄 시위가 벌어졌다.

이날 시위 도중에 최루탄을 눈에 맞아 사망한 당시 17세 고교생 김주열 군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 떠올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드디어 4.18일 고대생들이 거리로 나섰고 시가시위보도와 자유당 깡패집단의 쇠파이프 각목 피습사건 등 처참한 신문보도는 온 국민의 격분을 폭발 시켰다.

시위는 전국적으로 번졌다.

이어 대학교수들이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동숭동에서 종로까지 행진했다.

계속되는 시위의 강경 진압으로 전국에 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부정선거 규탄시위는 많은 부상자와 사망자가 나오는 가운데 독재타도 시위로 바뀌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下野)를 발표했다.

학생과 군중들이 동참함으로써 독재정권이 무릎을 꿇은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망자 186명 부상자 6,026명이 나왔다.

민주주의를 위한 희생이요 ‘피의혁명’이었다.


그러나 정권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채 보수정당인 민주당에 넘어갔고 민주당은 혁명성이 약해 5.16 군사쿠데타의 군화발로 밟히면서 군사정권에 넘어가게 되었으며 4.19 혁명은 미완성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4.19의거’로 불리우던 것이 1994년에 그 의미의 정신이 재조명 되어 4.19혁명으로 정당한 역사적 평가를 받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며 그 결과 공원 묘지로써 관리하던 4.19묘지가 성역화사업을 거쳐 1995년 4월 19일 국립묘지로 승격된 것은 자유를 위한 희생이 국민에게 값진 것이라는 것은 알려준다.


뿐만 아니라 1997년 4.19에는 최신 시설을 갖춘 4.19혁명 기념관이 개관됨에 따라 4.19혁명은 계승한 정신적 산교육장과 우리나라 민주주의 이념의 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라 하겠다.

4.19혁명은 5.16군사정변으로 단명의 혁명이 되었지만 1980년대 민주화운동에 계승됐고 우리국민은 1987년 이후 민주화를 이룩했다.


그 후 5차례 평화적 이고 공정한 선거에 의해 정권이 교체된 것은 대한민국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뿌리내렸음을 뜻한다.

단시간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달성한 근현대사의 맥락에서 4.19혁명 정신을 오늘에 살리는 일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다.

아직도 민주주의에 목말라 있는 우리에게 4.19혁명정신은 여전히 우리의 심장 속에 정의의 고동으로 살아 숨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