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바람의 말
[기고] 바람의 말
  • 신아일보
  • 승인 2023.07.09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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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주 작가(수필가)
 

처음엔 딸의 고사리 손을 빌렸다. 한 개 100원부터 시작했다. 결국, 10원까지 내려갔다. 100원이었을 때는 스스로 하겠다고 덤비더니 10원이 되었을 때는 내가 통사정을 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은 최후통첩을 해왔다. 흰머리를 다 뽑으면 대머리 될 거라고, 더는 손을 쓸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되었다. 염색을 해야 했다. 
  
홈쇼핑 채널에서는 오징어의 먹물 염색약부터, 열대성 관목 로소니아이너미스라는 듣도 보도 못한 나무의 잎을 원료로 만든 헤나 염색약까지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 오징어 먹물 통을 뒤집어쓸 거란 생각은 살면서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들갑스럽게 떠들어 대는 쇼핑호스트는 끈질기게 흑발을 유혹했다. 먼 이야기인 줄 알았는데 시간의 흐름을 부정할 수 없는 백발은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데 한때, 내가 백발을 열망하던 때가 있었다. 예닐곱 살 무렵인 것 같다. 나는 종종 외가에 맡겨졌다. 외가는 산 중턱 외딴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대문이라 할 만한 문도 없고 우물곁에 기와로 덮인 담이, 산과 집의 경계를 지어 줄 뿐이었다. 

마당을 지나 툇마루에 오르면 안방과 작은방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 특히 안방은, 앞문과 뒷문이 마주하고 있어 문을 다 열어두면 바람이 잘 통했고, 뒷문을 열면 나무들과 억새를 마주할 수 있어 산의 일부처럼 느껴지는 집이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논으로 밭으로 일을 나가시면 혼자 집을 지켜야 했다. 스스로 동무를 만들어 놀 수밖에 없었다. 내 동무는 목청 좋은, 만난 적 없는 뻐꾸기였고, 빨랫줄에 매달린 고추잠자리였고 잡을 수 없는 구름과 풀꽃들과 가끔 마루를 오르는 왕개미 등이었다. 그렇게 천지 사방의 모든 것은 내 벗이었고 나는 벗들에 대한 호기심에 넘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였다. 수저를 내려놓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왜 자꾸자꾸 바람소리가 다르지? 큰바람이 우웅~ 하고 불면, 키 큰 나무들이 잎을 떨면서 바스스 소리를 냈다. 나무가 떨고 있었다. 

그러면 작은 바람이 꼬리를 물고 따르면서 풀들을 간질이는 소리가 났다. 바람이 뭐라고 하는 거지? 바람이 나무에게, 바람이 풀들에게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는 모르는 것이 없는 분이시다. 가끔 까치가 우는소리를 듣고 손님이 온다고 일러주시기도 했다. 
  “할머니, 바람이 뭐라고 하는 거야?”
  
막힘없이 답을 해주셨다. 그건, 내가 밥을 먹다 남겨서 앞으로 밥을 남기면 혼내줄 거라는 소리를 한 거란다. 나는 깜짝 놀랐다. 바람이 어떻게 알았지. 한 두 숟가락쯤 남기는 밥을 놓고 할머니와 승강이를 벌이는 것을 바람이 안단다. 어떻게 그런 일이, 정말일까, 믿기지 않았지만 바람의 존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바람이 크게 불면 키 큰 억새의 허리도 꺾인다. 무심코 잡았던 억새 잎의 예리한 날에 손을 베였던 나는, 억새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 억새도 바람이 지나가면 키를 낮추고 바람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바람은 행패를 부리는 불량배처럼 방문도 순식간에 꽝꽝 여닫기도 해서 나를 놀라게 한 적도 많았다. 때로는 무섭게 흙먼지를 일으키며 세숫대야를 이리저리 몰고 다니기도 했고, 마당을 온통 검불 투성이로 더럽히기도 했다. 
  
그런 바람을 무시하기란 쉽지 않았다. 바람의 꾸지람을 들은 후부터는 밥을 남기는 일은 없었다. 정말일까 의심도 해봤지만 큰바람이 불면 내가 뭘 잘못했을까, 곱씹어 보기도 했고 괜히 위축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할머니의 말이 미심쩍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아무리 귀를 쫑긋 세우고 몇 번이고 듣고 들어도 휘잉~, 우웅~, 소리밖에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는 어떻게 바람의 말을 듣는 걸까, 궁금해서 물었다. 하지만 비밀이란다. 할머니는 호락호락한 분이 아니셨다. 물어도 비밀이니 말할 수 없다 하셨다. 속이 탔다. 바람하고 할머니만 아는 비밀이라니, 나보다 바람하고 더 친하단 말인가. 샘이나 떼를 쓰기 시작했다. 

한참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자, 손을 들고만 할머니는 누가 엿들을 새라 작은 목소리로 흰머리가 있어야 들을 수 있다고 말씀해 주셨다. 
 
‘ 이게 무슨 말이지?’ 흰머리는 산 아래에 사시는 큰할아버지와 큰할머니까지, 할머니나 할아버지들한테 만 있다는 걸 보아 알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있을지도 모르니 찾아봐 달라고 할머니께 졸랐지만 보나 마나 없다고 말을 똑 자르셨다. 

할머니한테는 수없이 많은 흰머리가 내게는 하나도 없다니, 이렇게 불공평한 일은 세상에 없었다. 심통이 나 할머니를 끌어 앉혀 무릎을 베고 누워버렸다. 하는 수없이 머리를 이리저리 뒤적이시더니 기도하는 심정으로 얌전히 누워있던 나를, 없다는 말로 울상을 만들었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었다. 흰 머리카락이 한 개만 있어도 들을 수 있는 것이냐고 물었다. 아니라 하셨다. 두 개면, 아니다. 세 개면, 아니다. 바람의 말을 간절히 듣고 싶은 마음에 묻고 또 물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으셨다. 크게 인심을 써 내가 아는 최대의 수인 손가락을 다 핀 열을 불러 보았지만 무수히 많은 열의 흰머리를 보여주시면서 이렇게 많이 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말할 수 없이 실망스러웠다. 내 머리는 온통 검었다. 

내 머리는 언제 하얗게 변해 바람의 말을 듣게 될까. 나만 빼놓고 바람하고 할머니하고 둘이만 얘기하는 게 약이 올랐다. 
  
흰머리에 대한 간절함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할머니의 작은 경대 앞에서 머리를 뒤져 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게 했다. 몇 날 며칠을 아무리 찾아봐도 흰머리는 돋아나지 않았다. 벽에 걸린 달력이 넘어가도 마찬가지였다. 풀이 죽고 말았다.
  
그 후 은근히 흰머리에 대한 반감을 품게 됐다. 할머니는 가끔 염색을 했다. 염색을 하면 포장 용기에 그려진 흑발의 아름다운 여인처럼 된다고 하셨지만, 이상하게 할머니는 아무리 염색을 해도 그 여인과는 닮아 가지 않았다. ‘예뻐지지도 않으면서, 흥.’ 나는 그렇게 바람의 말을 혼자만 알아듣는 할머니가 야속했다.
  
한때, 열망의 대상이 드디어 내게도 돋아났다. 솔직히 반갑지 않다. 당황스럽기도 하고 허망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할머니 말씀처럼 정말 바람의 말을 들을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바람의 말은 하루 이틀에 들을 수 없는 삶의 지혜요, 이기고 견뎌낸 세월이 내게 준 선물이기 때문이다. 
  
검은 머리가 하나둘씩 은빛으로 물들면 삶의 지혜 또한 늘어남을 반가워하리라. 그래도 염색을 고집하는 것은 겸손함을 잃지 않기 위함이라고 해두자. 아직은 은빛으로 반짝이는 삶의 백발 고수들의 인생 반열을 넘볼 때가 아니니 말이다. 
  
신은 참으로 위대하시다. 눈에 띄는 은빛으로 삶의 풋내기들 사이사이 백발을 두어 길잡이 노릇을 시키시니 말이다. 조언을 듣고 싶거나 걱정 근심거리를 가지고 그들을 만나게 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것이다. 가끔 짝퉁도 있다. 

새치가 그것이다. 구별법으로는 얼굴에 주름이 있는가이다. 바람이 지나간 골골이 패인 자리, 넉넉히 가지고 있어야 바람의 말을 제대로 듣는 이이다.
  
할머니 말씀이 틀리지 않았음을 이제야 알았다. 먼 훗날 손자와 나란히 바람을 맞게 되면 바람의 말을 일러 주리라. 까만 눈동자에 내 모습이 퐁당 빠진 손자가 어떻게 듣느냐고 물으면 할머니가 내게 한 것처럼 자랑스럽게 흰머리를 보여주며 웃어 주리라. 

/김형주 작가(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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