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천 뚜껑 꼭 열어봐야 아나?
공천 뚜껑 꼭 열어봐야 아나?
  • 김 훈 동
  • 승인 2010.04.08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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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귀가 다시 변한다 하여도 검은색을 바꿀 수는 없다.

6.2지방선거에 나서는 예비후보자들은 출마선언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던 행렬이 끝나고 이제는 속을 태우며 공천대기선에서 주자(走者)의 바통만을 이어 받길 학수고대하고 있다.

여야 정당은 저마다의 공천 잣대를 만들어 역량 있는 공천자를 가려내기 위해 요리조리 재느라고 여념이 없는 듯하다.

공천심의위원들은 공정하고 투명한 공천을 다짐하며 클린공천서약까지 할 정도다.

선거 역량을 갖춘 마땅한 인물을 찾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리도 들린다.

어느 물인들 고기가 없으며, 어느 조직인들 사(私)가 없겠는가? 공천은 아이장난이 아니다.

성실하게 수행해야 마땅하다.

역사에 있어서 언제나 ‘위대함의 징표’가 된 것은 그때그때의 상황에서 필연적인 것을 완성한 사람들이었다.

역사의 상황 속에서 필연적인 것을 완성한 사람이야말로 바로 운명을 창조한 사람이다.

그런데 꼭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밖에 없느냐는 목소리도 높다.

공천을 신청한 후보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유권자가 제일 잘 알기에 그렇다.

물론 연고도 없는 인물이 낙하산타고 올 때는 모를 수밖에 없다.

‘콩나물이 아주 크게 자랐다.

그래 봤자 보통 나물이다.

’ 큰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힘의 근원은 유권자다.

비록 초라하고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유권자와 함께해야 선거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이 축적된다.

어디가 절벽이고 어디가 늪이며, 무엇이 덫인지 알아야 한다.

메인 게임을 치르기 전에 철저하게 후보자들의 자질을 검증할 필요는 있다.

당내 파벌간의 주도권 싸움으로 엉뚱한 후보를 내는 일이 없도록 공천과정에서 성숙성을 보여줘야 한다.

비록 자파(自派)의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유권자의 여망에 들어맞는 후보자를 찾아 내세우는 아량을 가져주어야 한다.

그간 수많은 선거를 치르면서 유권자들은 현명해졌다.

감언이설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들을 줄도 안다.

총명성도 갖추고 있다.

나쁜 대나무에서 좋은 죽순이 나올 수 없다.

오죽하면 ‘정치가는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 자신이 믿지 않기 때문에 남이 그것을 믿는 것을 보고 놀란다’고 정치가의 거짓말을 꼬집었을까? 돈이 있으면 나쁜 놈도 상석에 앉는다.

순박한 유권자가 현혹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우리들이 어떤 형질을 가지고 그간 어떤 선거지형(地形)을 만들어 왔는지를 살펴야 한다.

역사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공천은 물론 어렵고 힘든 작업이다.

‘과정의 공정성’도 중요하다.

공천과정의 공정성에 대한 신뢰가 어느 정도 확보되었느냐는 아주 중요하다.

그것이 본선 레이스에서 승패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유권자의 눈에 정치적인 고목(枯木)들은 빼곡한데 정치적인 거목(巨木)들은 보이지 않는다면 곤란하다.

쓸만한 거목과 땔만한 고목간의 차이지만 정치판에서는 중요한 관건이기에 그렇다.

유권자는 고객이자 상전이다.

논바닥의 피도 뿌리가 있고 씨앗을 퍼뜨린다.

낙하산 후보자의 요식적 옹립이나 자유경선으로 벌어지는 진흙탕 싸움에 유권자들은 넌더리를 낸다.

유권자로부터 완전히 외면당한다.

경쟁은 준엄하고도 잔인한 것이다.

후보자가 정치적으로 떼를 쓴다고, 목소리를 높인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스키외는 그의 유명한 법의 정신에서 ‘한 나라의 정치풍토와 제도는 결국 그 나라 유권자들의 의식수준을 반영할 따름이다’라고 설파하였다.

정치인이나 정당을 탓만 할 수 없다.

공심위가 합리적이고 현명한 판단 위에서 결정할 것이지만, 이제는 ‘뚜껑을 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 아닌가. 숫한 선거를 치러 왔다.

손에 권력을 쥐고 있으면 신선도 세배하러 온다.

역사는 죽어있는 과거만의 기록이 아니다.

역사에 악재(惡材)로 기록되면 두고두고 지탄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역사가 우리에게 일러주는 교훈이다.

공천뚜껑을 열지 않고도 유권자가 알 수 있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공천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