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 벌거벗은 글씨
[금요칼럼] 벌거벗은 글씨
  • 윤경진 기자
  • 승인 2023.05.12 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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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먹글씨연구소 황성일 대표

‘인사동시대’를 연 신아일보가 창간 20주년을 맞아 ‘문화+산업’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칼럼을 기획했습니다. 매일 접하는 정치‧경제 이슈 주제에서 탈피, ‘문화콘텐츠’와 ‘경제산업’의 융합을 통한 유익하고도 혁신적인 칼럼 필진으로 구성했습니다.
새로운 필진들은 △전통과 현대문화 산업융합 △K-문화와 패션 산업융합 △복합전시와 경제 산업융합 △노무와 고용 산업융합 △작가의 예술과 산업융합 △글로벌 환경 산업융합 등을 주제로 매주 금요일 인사동에 등단합니다. 이외 △푸드테크 △벤처혁신 △여성기업이란 관심 주제로 양념이 버무려질 예정입니다.
한주가 마무리 되는 매주 금요일, 인사동을 걸으며 ‘문화와 산책하는’ 느낌으로 신아일보 ‘금요칼럼’를 만나보겠습니다./ <편집자 주>

 

고기 좀 먹어 본 사람들의 이야기다.

쇠라도 녹일 듯한 참나무 백탄 위에 올려진 고기 한점이 있다. 영롱한 마블링을 지닌 투뿔(1++) 한우의 살치살 한점에 마음을 잃는다.

그저 약간의 소금만으로도 충분하지만 고추냉이, 머스타드에 이어 발사믹, 트러플 오일까지 욕심을 낸다. 눅진한 지방과 수많은 소스들이 뒤엉켜 정작 한우의 육향을 느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시간이 흘러 문득 육향이 그리워지는 날이 올 것이다.

고소한 지방이 만들어낸 새하얀 패턴들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 선홍색의 안심을 숯불에 살짝 그슬려 입안에 닿을 때쯤 ‘유레카’를 외치게 된다. 아무것도 더해지지 않은 본연의 맛이다.

글 쓰는 사람이 웬 고기 타령이냐고? ‘맛과 멋’은 말 그대로 점 하나 차이다. 재료 본연의 맛이나 붓 끝에 실린 획이 갖는 멋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은 아닐까.

기술의 발달로 몇십년 된 영상도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언제부터인지 영상 속 여배우들의 화장이 점점 옅어지고 ‘누드메이크업’이라 불리는 과도기를 거쳐 요즘 SNS에서는 ‘노메이크업’이 당당하다. 개성 충만한 눈빛과 몸짓은 천편일률적으로 만들어진 그 시절을 훌쩍 뛰어넘는다. 완벽함은 무엇 하나 덧붙일 수 없는 상태가 아니라 더 이상 뺄 것이 없을 때를 가리킨다.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본인의 이름 석자로 서명을 시작해 수없는 반복으로 어느새 본인만이 알아볼 수 있는 단순화된 서명을 갖게 된다. 타인은 알아보기 힘든 그 서명 안에는 수없이 쓰인 이름 석자가 들어있다. 자기 생각과 무한한 교류를 통해 얻은 천금같은 일획이, 대가의 작품들과 견줄 만하다. '일획이 만획이고 만획이 일획이다.' 조선말기 괴짜화가 오원 장승업의 말이다.

조선 최고의 명필 추사 김정희의 마지막 작품이라 일컫는 ‘판전(板殿, 봉은사 소재)’, 아흔이 넘어 그린 피카소의 ‘자화상’의 공통점이 있다면 아무것도 더하지 않은 ‘날것’의 맛이다. 이 느낌은 대가가 아니더라도 작가의 초기작품에서 때로는 말년의 작품에서 볼 수 있다. 어설픈 멋을 부리기 전의 순수함이 담긴 초창기의 작품과 산해진미를 다 경험하고 집밥을 그리워하듯 최고의 경지에 이른 후의 깨달음에서 나온 것이다. 뛰어난 솜씨는 서툰 것처럼 보인다(대교약졸 大巧若拙)고 했다. 

가장 좋은 골프채는 ‘남의 채’라는 말이 있지만 가장 좋은 글씨는 ‘나의 글씨’다. ‘다름’은 나를 표현하는 최고의 경쟁력이다. 한치 오차 없는 궁체의 유려함도 좋지만 나만의 글씨를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하지 않도록 균형과 조화를 이룰 수만 있다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최고의 글씨가 될 수 있다. 크고 작고, 굵고 가늘고, 짙고 옅음이 서로 조화를 이뤄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카디날 장미 한다발에도 심장의 펌핑소리는 커지겠지만 이름 모를 들꽃들이 함께 조화를 이룬 소박한 꽃다발에서 깊은 여운이 남는다. 꽃의 여왕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또 다른 행복이 나를 새롭게 한다. 서로 다른 것들이 조화를 이뤄 새로운 ‘무엇’이 되는 과정이 창작이다. ‘창조는 그저 서로 다름을 연결하는 것’이라 했던 스티브잡스의 말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다.

/ 황성일 먹글씨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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