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들은 왜 우는가
아버지들은 왜 우는가
  • 박 범 신
  • 승인 2010.03.0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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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의 “일요일, 일요일 밤에” 라는 프로그램에 ‘감동적인 아버지’를 찾아 냉장고를 선물하는 코너가 있다.

카메라가 선술집이나 음식점 등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보통 아버지들을 인터뷰하고, 인터뷰 도중 자녀들과 전화연결도 하는 그런 코너다.

놀라운 것은 인터뷰 도중 많은 아버지들이 울거나 눈시울을 붉힌다는 것이다.

보편적 관점으로 보면 눈물은 여자들의 언어이다.

어머니가 울고 누이가 울고 사랑하는 그녀가 우는 걸 우리는 많이 보았다.

남자들이란 울음이 나도 그것을 감춰야 한다고 배웠다.

남자는 가정에서나 사회에서나 일종의 ‘리더’로서 여자보다 강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문화 속에서 남자들은 어렸을 때부터 ‘권력자’로 길러진다.

“너는 남자야!” “남자니까 약해빠져선 안돼!” “남자다워야지!” 어머니와 누이가 속삭이고, 아버지와 삼촌이 소리치고, 세상이 은연중 으름장을 놓는다.

남자는 그래서 울어야 할 때도 참는데 익숙하고, 그래야 ‘남자답다’ 고 여겼다.

그런데 요즘은 아버지들이 주로 운다.

특히 젊은 아버지들이 그렇다.

젊은 어머니들은 대체로 씩씩하고 활달한데 젊은 아버지들은 어딘지 모르게 어깨가 숙은 듯하고 자신이 없어보인다.

“일밤”의 카메라에 잡혀 나와 눈시울을 붉히는 아버지들도 대게 중년을 넘기지 않은, 비교적 젊은 아버지들이다.

세상이 얼마나 많이 달라졌나 하는 것을 ‘우는 아버지’들을 볼 때 나는 선연히 느낀다.

오늘 날의 ‘가장’들은 어렸을 때 권력자가 되도록 길러졌지만, 그들이 정말 ‘가장’이 됐을 때는 남아 있는 권력이 없었다.

호주제의 폐지로 절대적이었던 ‘가계계승권’도 사라졌고 재산에 대한 행사권도 대부분 해체됐으며, 따라서 어떤 권위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가장’이라고 권위를 부리다간 오히려 가족과 사회로부터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으로 비웃음만 사기 쉽다.

그런데도, 가족을 먹여 살리고 그 안위를 책임져야할 ‘의무’는 별로 덜어진 게 없다.

말하자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권력과 권위는 다 사라졌는데 책임과 의무는 계속해서 무한 강조되고 있다는 셈이다.

남자들 입장에서 보면 그야말로 ‘상실의 계절’이 아닐 수 없다.

남자는 원래 ‘강하게’ 태어나는게 아니다.

강하게 길러질 뿐이다.

뱃속에서 유산되고 마는 유산아의 경우도 그렇거니와, 생후 일년 이내에 죽는 유아사망의 경우도 삼분지 이 이상이 남자들이다.

평균수명도 여자가 훨씬 높다는 건 알려진 사실이다.

게다가 중년에 배우자가 죽어 혼자 살게 될 때, 여자들은 혼자 사는 게 남은 생애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남자들은 혼자 산다는 이유만으로 수명이 많이 감소된다는 보고서도 있다.

남자들이란 생물학적으로 봐도 불완전하게 태어날 뿐만 아니라 어디에 의지하지 않고 제 존재를 단독자로서 짊어져갈 근원적인 에너지가 여자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증거들이다.

한마디로 말해, 남자들은 약한 동물이다.

그들은 ‘강하게’ 길러졌으므로 ‘강한 척’ 하면서 살아왔을 뿐이다.

아니 그들은 삶의 최전선으로 나아가 가족들을 위해 ‘과실’을 따오고, 가족들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에 가까운 책임과 의무 때문에 ‘강한 척’ 허세를 부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치가 그러니, 사실 텔레비전 인터뷰 중의 젊은 아버지들이 너나없이 우는 건 본질적으로 보면 매우 자연스럽고 당연한 풍경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조국’을 위해 울었던 과거의 아버지들과 달리, 이제 일상 속에서 가족들에 대한 ‘사랑’과 ‘사랑을 의무로 드높이지 못한 회한’ 때문에 운다.

자연스럽다고 받아드리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알랑’은 그의 ‘행복론’ 에서 이르기를, ‘남자들은 건설해야 할 것도 파괴해야 할 것도 없어지면 아주 고독해진다’ 라고 했다.

오늘날의 남자들은 이미 ‘건설할 것도 파괴해야 할 것’ 도 없는 고독한 존재들이 되었다.

그들을 위로할 사람은 자신과, 그들의 가족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