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독립선언과 ‘우리의 각오’
2·8 독립선언과 ‘우리의 각오’
  • 강남욱
  • 승인 2010.02.07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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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91년前, 일본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동경에서 독립을 선언한 날이 바로 2ㆍ8 독립선언 일이다.

대체로 3ㆍ1운동은 잘 알고 있지만 2ㆍ8 독립선언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국가차원의 홍보가 부족한 탓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과 함께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한 것과 세계 언론들이 약소민족의 독립 및 발언권 요구 등을 집중적으로 보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재일 유학생들 사이에서 독립운동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갔다.

이러한 가운데 유학생 400여명이 선언문을 우편으로 동경 주재 각국 대사관 및 공사관과 일본정부의 각 대신, 일본 귀족원ㆍ중의원, 조선총독 및 각 신문사로 보냈고, 1919년 2월8일 일본 동경의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600여명의 지지 속에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던 역사적인 날이다.

독립선언서는 ‘일제의 침략은 사기와 폭력에 의한 것이었다고 고발하면서 1910년 강제로 체결된 한일합방 조약의 폐기와 조선독립을 선언하고 민족대회 소집을 요구하며 이를 실현하기 까지 혈전도 불사할 것을 선언’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2ㆍ8독립 선언은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투쟁적이고 체계적이며 동시에 비판적이었던 것으로 국내 3ㆍ1운동을 야기하는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고, 국내외에 수많은 독립운동단체가 조직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매년 국가보훈처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를 선정해서 발표하고 그 달 그 달의 독립운동가를 별도로 홍보하고 있다.

올 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김상덕(金尙德) 선생은 동경 2ㆍ8독립선언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르고 중국으로 망명, 중경에서 임시의정원 의원과 임시정부 문화부 부장으로 활동을 하셨으며, 또한 광복 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바 있어, 1990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올해는, 국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일제 식민지 통치를 받게 된 생각하기 조차 싫은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이한 해이다.

경술국치 당시를 회상하고 반성하며 개개인의 잘못으로 다시금 경술국치와 같은 치욕적인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국민들이 하나로 똘똘 뭉쳐야한다.

말로만 나라사랑을 외칠 것이 아니라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모습을 보어야 한다는 말이다.

91년 전, 독립을 위해 국내는 물론 일본 동경 등지에서 분연히 일어나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합쳤던 애국선열들이 계셨기에 오늘의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이뤄낼 수 있었다.

우리들의 후손을 위해서라도 반드시 하나로 뭉쳐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