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투고] 너와 나의 역사, 3.1운동을 기리며
[독자투고] 너와 나의 역사, 3.1운동을 기리며
  • 신아일보
  • 승인 2022.02.27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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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민 인천보훈지청 복지과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 만방에 고하야 인류 평등의 대의를 극명하며 차로써 자손 만대에 고하야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1919년 3월 1일 태화관. 민족대표 33인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목소리는 거침이 없었고 선언문의 내용은 조선인의 가슴 속에 불씨를 지피기에 충분했다. 이후 탑골공원으로부터 울려 퍼지는 수많은 민중의 외침. "대한독립 만세!" 

너나 할 것 없이 구름 같은 인파가 거리에 나와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책가방을 멘 학생, 아이를 업고 있는 부인, 작은 노점을 운영 중인 노인 등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그들의 신분과 계층은 각기 달랐으나 나라를 읾은 아픔이 그들을 한데 모이게 했다. 그들이 원하는 바는 오직 '자유와 독립'이었다. 한민족 최대 규모의 독립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이 만세운동이 미친 영향력은 실로 대단했다. 대내적으로는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고,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5.4운동과 인도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이 일어나는 원동력이 되었다. 

3.1운동이 상당한 파급력을 가진 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너나 할 것 없이 각계각층이 참여했기 때문이다. 천도교, 불교, 기독교계 인사들이 참여한 독립선언문, 같은 해 유교계 유림들이 주도한 파리장서운동 등 종교를 불문했다. 지식인층, 상인계층, 농민층, 학생층 등 신분과 계층을 망라했다. 단적인 예로 3.1운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 중 한 명인 유관순 열사는 당시 18세의 어린 학생에 불과했다. 

유관순 열사는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1914년 공주영명여학교에 입학, 1916년 선교사의 소개로 서울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생으로 편입한 후 1918년에는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가 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유 열사는 당시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됐다. 

인천에서 처음으로 만세운동을 시작한 것도 학생층이었다. 인천의 3.1운동 발상지는 동구에 소재한 창영초등학교다. 당시에는 "인천공립보통학교"로 불렸으며, 서울에서 발생한 운동의 소식이 인천까지 전해지자 이 학교의 고학년생들을 중심으로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렇듯 3.1운동은 어느 한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평범한 일상을 살던 너와 나의 역사였다. 

그러나 이 숭고한 역사 이면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분들의 지대한 희생이 있었다. 그들 역시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었고, 아들이었다. 찬란한 꿈을 품은 소년이었으며, 연인과 혼인을 앞둔 청년이었다. 아니면 하루하루 커가는 아이의 어리광에 행복해하던 부모였을 것이다. 하지만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이 모든 것을 포기했다. 더이상 사랑하는 이들을 볼 수 없었고,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살림과 재산도 몰수당했다. 그리고 온갖 고문에 시달리며 옥중에서 생을 마감해야만 했다. 

이처럼 독립지사 분들이 흘린 피와 눈물의 무게는 조금도 가볍지 않다. 현재 우리가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고 있는 삶의 터전과 자유는 이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밑바탕이 된 것이다. 따라서 삼일절을 맞아 선열들을 기리는 것은 우리 후손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한다. 매년 돌아오는 날이라 할지라도 그분들의 본을 따라 국가와 이웃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보면 어떨까.
 

/유민 인천보훈지청 복지과

[신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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