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나뭇꾼 시인 정초부(1714~1789) 
[칼럼] 나뭇꾼 시인 정초부(1714~1789) 
  • 신아일보
  • 승인 2020.07.09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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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탄스님 용인대 객원교수
 

한 척의 나룻배가 강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한 <도강도>에 김홍도가 영감을 받았다는 시가 쓰여 있다. 

서정적이고 회화적인 필치로 쓰인 시, ‘동호범주(東湖泛舟)’이다. 이 시와 동일한 작품이 실린 시집, <초부유고(樵夫遺稿)>가 발굴된 적이 있다.

조선 후기 천재 화가의 마음을 움직인 시인은 초부(樵夫) ‘나무꾼’이었으며 노비였다.

조선시대 문예부흥기에 해당하던 정조시절 정초부(鄭樵夫1714~1789)라는 그 노비 시인의 시는 수백년 세월이 지난 지금 읽어 보아도 절창이 아닐수 없다.

월계협을 지나며 "강 따라 가파른 석벽 사이 들어가니 남쪽은 허공이고 북쪽은 높은 산이라 놀랍기도 하지만 기쁘기도 한지라 마상에서 공연히 한바탕 웃어보았네."

여춘영의 문집, <헌적집>에는 정초부에 대한 시와 두 사람이 함께 지은 시 뿐 아니라 그의 죽음을 애도한 제문까지 실려 있다. 신분의 벽을 뛰어 넘어 깊은 교우 관계에 있었던 주인과 노비의 인연, 여춘영은 정초부의 시를 사대부 사회에 널리 소개하며 그를 세상에 알렸다.

나무꾼 신세로 늙어간 시인, 노비였지만 양인이 돼 시인으로 명성은 높았지만 그의 전생애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다.

정초부의 초가집으로 쌀 빚을 갚으라고 아전들이 쳐 들어오지만, 그는 갚을 쌀도 없었고 버틸 권력도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시를 쓸 능력은 있었다. 시는 때때로 논리가 정연한 문서보다도 더 강한 힘이 있다.

고단한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었던 노비 시인 그는 '동원아집(東園雅集)'의 기록을 보면 양반 모임에도 초대됐다.

그의 시에 감명을 받은 양반들은 그가 살던 양근(현재의 경기도 양평)월계협으로 직접 찾아가기도 했다.

정초부의 시가 실린 시선집은 발견된 것만 10여권에 이르는데, 천민인 그가 어떻게 양반들도 짓기 어려운 한시를 지을 수 있었을까.

그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본 주인은 아들 여춘영의 글공부에 함께하도록 배려한 덕분이며, 여춘영의 문집 '헌적집'에는 정초부에 관한 시, 함께 지은 시, 그리고 정초부의 죽음을 애도하는 제문까지 실려있다. 

당대의 지식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한 그 시집의 창작자가 노비였지만 천부적 재능을 지니었으며 신분의 벽에 가로막혀 평생을 가난한 초부로 살았던 노비 시인 정초부의 삶 중심에는 그의 주인이던 여춘영과의 주종 관계와 연령을 초월한 우정의 이야기가 담겨있다.

일찍이 여춘영 부친은 어깨 너머로 들은 한시를 암송하던 정초부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글을 가르쳤으며, 그와 함께 공부하며 자란 여춘영은 20살 위인 그를 스승이자 벗으로 여겼다. 

연령을 초월한 우정 이야기는 눈물겹다. 여춘영은 조선후기 명문가 집안 중 하나인 함양 여씨다.

헌적집에는 1789년 정초부가 76세로 사망하자 여춘영이 그를 추억하며 지은 만시(輓詩) 12수에서 정초부를 추억하며 그를 묻고 돌아오는 길에 다음과 같은 시를 짓기도 했다.

"저승에서도 나무하는가? 낙엽은 빈 물가에 쏟아진다.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 내세에는 그런 집에 나시오.”

주인집 자제들이 배우는 글을 어깨너머로 배웠으며 가난한 초부로 생을 마치고 생전에는 한 권도 내지 못한 문집을 죽은 후에야 유고집으로 내놓을 수 있었다.

그의 시가 신분의 한계와 가난의 고통이 예술로 승화돼 많은 이들에게 구전되며 오래 기억될 수 있었던 이유는 '누구도 신분으로 차별받지 않고 실력으로 평가받길 바라는 민초들의 염원'이 반영된 결과이다.

/탄탄스님 용인대 객원교수

※외부 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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