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선열들의 얼”
“빛나는 선열들의 얼”
  • 조양제
  • 승인 2009.03.19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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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의 독립운동은 부산시민들의 기질만큼이나 열정적이고 끈질겼다" 올해는 제 90주년 3.1절을 맞이한 해이다.

해마다 3월이 되면,일제 강점기 당시 조국의 독립을 애타게 외쳤던 선열들의 외침이 들려오는 듯 하다.

구포장터만세운동은 1919년 3월 29일, 구포장날에 맞추어 거사를 계획한 주모자들과 그날 모인 장꾼 천여 명이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친사건이다.

시위 시작 후 주동인물들이 일경에 체포되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자 시민들이 갇혀 있던 애국동지들을 구출하기 위해 주재소를 습격한 사건이다.

이날 시위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는 노령(당시 68세)의 윤정은 옹도 있었다.

윤 옹은 1919년 3월 29일의 구포(龜浦)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이곳의 독립만세운동은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학생인 양봉근(楊奉根)이 고향으로 내려와서, 구포면 면서기인 임봉래(林鳳來)를 만나 서울과 평양(平壤)의 독립만세운동의 소식을 전함으로써 계획되었다.

3월 27.28일에 걸쳐 이곳 청년들은 몇 차례의 회의를 통해 구포 장날인 3월 29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교대로 밤을 새워가며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독립기 등을 제작하였다.

3월 29일 정오, 그는 이 계획에 적극 찬성하여 구포장터에 모인 1천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대와 함께 행진하였다.

그러나 곧 출동한 일본 경찰에 의해 김옥겸 등 11명의 주동자들이 체포되어 구포주재소에 구금되었다.

이에 격분한 윤정은 옹은 오후 3시경, 시위군중과 함께 구금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를 습격하여 맨주먹과 곤봉으로 주재소 건물과 기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병력이 증원된 일본 군경의 무차별 사격으로 말미암아 많은 부상자를 낸 채 해산하였다.

그 후 일제에 체포된 그는 8월 26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3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노쇠한 몸으로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이듬해 1월 19일 향년 69세를 일기로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오는 21일에는 구포시장 일대에서 구포장터 만세운동을 재현하는 행사가 11번째로 열린다.

윤정은 옹이 노령의 몸을 이끌고 만세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내 후손들에게 떳떳한 자주독립국가를 물려주고자 했던 윤 옹의 정신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번 구포장터 만세운동 재현행사가 부산지역 학생들과 시민들이 다시 한번 선열들의 위국헌신의 나라사랑정신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