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사구시(實事求是), 빈곤의 정치
실사구시(實事求是), 빈곤의 정치
  • 오세열
  • 승인 2009.01.19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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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건국기 정도전(조선건국 전)을 통해 민본사상을 제시했다.

위정자들의 모든 행위는 백성을 위하고(爲民), 백성을 사랑하고(愛民), 소중하게 여기면(重民),백성을 보호하고(保民), 교육하며(敎民), 편안하게(安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주장이다.

조선조 실학자들이 민봉사상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통해 실현하자는 실학운동을 전개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대답은 뻔하다.

민봉사상과 실사구시의 정신이 실종된 까닭이다.

이 같은 실사구시 정신은 오늘의 정치에 대입해도 별로 달라질 게 없다.

우리는 지난 연말까지 난장판을 친 국회를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절망에 빠졌다.

경제위기로 나라가 휘청거리는 데도 싸움질 하는 여야 국회의원들은 그냥 내버려둬선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다.

국회의원들은 일반사회의 논리로 보면 기업의 종업원이나 농가의 머슴일 뿐이다.

그런데도 ‘여의도 물만 먹었다’하면 금방 변질된다.

더구나 모든 국민들에게 고통의 분담이 요구되고 실제로 수백만 명의 실직자들이 경제적 고통으로 신음하고 있는데도 당리당략에만 몰두하고 있는 그들은 통제 할 수 없다면 국민은 분명 핫바지 일 수밖에 없다.

이토록 비생산적 이며 몰염치함을 더 이상 그대로 방치 하는 일은 주권 재민의 민주국가에서 스스로 주권과 자존을 포기 하는 일이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그들을 감시 감독 하는 장치가 말런 돼야한다는 것이다.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1월에는 공동 여당인 국민회의와 자민련이 교원 노조법 등 70여개 법안을 단독처리 했고 김영삼 정부 때인 1996년에는 여당인 한나라당이 노동법 개정안 등 20여개 법안을 날치기 처리했다.

민주당은 지금 한나라당 출신 국회의장의 법안 직권상정을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여당이었던 17대 국회 때는 여당 출신 국회의장을 통해 5차례나 이명박 특검법 사학법 로스쿨 법 등을 직접 상정한 ‘전과’가 있다.

법안 강행처리와 육탄저지는 여야관계 악화 정국경색 민심의 역풍이란 심각한 후유증을 낳는 국회의 고질병이다.

날치기가 처리된 일부 법률이 위헌 판정을 받거나 재개정되는 것도 비슷했다.

그런데도 여야의 역할만 바뀐 채 같은 일이 반복 된다.

의원들이 기억 상실 증이 걸어 아예 망각하기라도 한단 말인가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여당대표와 원내대표가 정치력을 발휘했더라면 이정도의 법안 처리를 (국회를 무법천지로 만들지 않고도)작년에 다 할 수 있었다.

민생법안도 통과시킬 수 있었다’고 일침을 놓았다.

박관용 전 국회의장은 ‘한나라당이 한 지붕 두 가족인데 대통령은 왜 박근혜 전 대표를 안 만나냐 MB악법 야당탄압 운운하는 야당 측도 만나서 그게 아니다.

나라가 이렇게 어려우니 도와 달라고 성심껏 설득해야지 미국 대통령은 야당 접촉 일정이 많다’고 쓴 소리를 했다.

미국 대통령과 참모들은 주요 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해 야당 의원들을 설득하고 협상하는 게 체질화 돼있다.

물론 우리나라 대통령과 야당 정치인 사이에 이런 소통이 가능하려면 정치문화가 쌍방향에서 크게 바뀌어야한다.

야당 대표가 청와대 초청을 묵살 해버리고는 대단한 거사나 하는 듯이 행동하는 것은 안타깝다.

하지만 대통령이 리더십과 인내를 발휘해 소통과 타협의 정치동양을 만들어 나갈 수밖에 없다.

정국 혼란을 자초하고 민생을 살러내지 못한 채 이리 비틀 저리 비틀 하다가는 임기 후에 그 앞에 ‘잃어버린 5년’이라는 수식어도 붙게 되면 고달픈 것은 시민들이다.

게다가 본연의 업무에 비하여 비생산적 이고 국력 소모적인 국회는 더 이상 졸속 시킬 필요가 있을 가를 검토해 봐야한다.

기존의 질서와 이념만이 지상 최고의 이념이요 논리라는 법칙도 없는 것이 민주주의의 제도도 맞지 않고 실행할 수 없으면 과감히 변형하고 개혁해야한다.

우리는 해방 후의 정치사가 민주주의의 외형 갖기에 몰두한 시대라면 이제부터는 민주주의의 내실 갖추기 시대가 되어야 한다.

민주주의 꽃이라고 하는 의회가 썩어버린 상태에서는 우리는 민주사회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봉건시대 귀족을 먹여 살리는 17세기를 사는 것이다.

우리는 선량을 만든 것이 아니라 21세기의 새로운 귀족 계급을 만들어 놓고 마치 프랑켄슈타인 앞에 쩔쩔매는 본말전도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격이다.

이런 국회의 구조와 기능으로는 갈수록 살벌하고 냉혹해지는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가 쉽지 않다.

우리는 화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야한다.

서로의 마음이 열리지 않은 한 폭력의 병은 치유될 수 없다.

국회가 ‘법치의 의회’로 바뀌는 모습을 한번 상상 해보라 미래의 개척 그리고 국민 통합을 위해서라도 민심을 추스르는 실사구시의 정치체제를 만들어 가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