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식 금융감독원장이 ‘정의당 데스노트’에 이름을 올렸다. 정의당은 지난 12일 오전 상무회의에서 김 원장의 자진사퇴를 촉구하는 쪽으로 당론을 모았다. 금융계를 개혁해야 할 수장의 신뢰가 무너졌다는 판단이다.
문재인 정부 출범이후 정의당이 불가 방침을 밝힌 인사들이 예외 없이 낙마해 정치권에서 ‘정의당 데스노트’라 칭하는 점을 감안하면 그 충격파는 클 것으로 예상된다. 일각에서는 김 원장의 버티기가 이미 한계에 달했다면서 이번 주말쯤 결론나지 않겠냐는 조심스런 의견도 나온다.
정의당의 ‘자진사퇴 촉구’로의 변화는 청와대와 더불어민주당의 여권과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의 야권이 팽팽하던 대립 균형을 깨뜨렸다.
김 원장이 취임할 때만 하더라도 재벌개혁 등에 속도가 붙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에 이어 김 원장이 가세하면서 ‘참여연대 트로이카’가 대한민국의 개혁을 이끌어낼 것이란 기대가 컸다.
하지만 불과 며칠 만에 김 원장은 외유성 해외출장 논란에 휘말리면서 상처투성이가 됐다. 야당과 언론은 김 원장에 대해 후원금 땡처리, 고액 강연논란, 보좌진 6명에게 퇴직금 명목으로 2200만원을 지급, 국회의원이 된 후의 재산증가 등 엄청난 문제점이 있다는 식의 의혹을 연일 제기하고 있다.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이 문제의 본질은 국회의원이 본인뿐만 아니라 수행했던 정책비서의 비용까지 피감기관 돈으로 출장을 갔다는 점이라고 비판했다. 당시 법적인 제재를 받을 장치가 없었더라도 받지 말아야 할 돈을 받았다는 전력이 금융계 수장으로서 개혁을 끌고나갈 수 없고 끊임없이 자격 시비에 시달릴 것이라고 우려했다.
청와대도 고민에 빠진 것으로 감지된다. 여당 일부에서도 김 원장 카드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고백들도 나온다는 전언이다. 그러나 김 원장의 사퇴로 해결될 문제인지는 의문이다. 문재인 정부가 이뤄야 할 개혁의 축이 무너질 수도 있다는 걱정이다. 물론 철저한 인사검증으로 만인이 만족할만한 사람을 찾으면 된다. 그런 인재를 찾을 수 있다면 말이다. 개혁성과 청렴성, 강직성 그리고 절대적인 인간미까지 갖춰야 금융개혁과 재벌개혁을 이끌 수 있는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다.
한 때 ‘저승사자’라 불린 김 원장은 사실 재벌개혁, 금융개혁을 위해서는 필요한 인재다. 재벌 총수 중심으로 짜인 경제구조를 타파하기 위해 재벌 견제를 위한 소액주주운동, 회계보고서 열람 청구나 주주대표소송을 통해서 재벌을 견제하는 성과를 거뒀던 이력이 보증한다. 참여연대 사무총장을 거쳐 19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보여준 모습은 김상조 공정위원장과 호흡을 맞출 절묘한 한 수였다.
김 원장의 사퇴 여부를 떠나서 이번 문제는 우리 사회에 또 하나의 규범을 제시한다. 공직자가 지켜야 할 몸가짐의 중요성이다. 기득권과 결합된 우리 사회의 적폐, 이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해가 끈질기게 이어질 것인가라는 각성이다. 관행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서 변화를 거부하고 당장의 편익에 안주하며 근본적인 개혁에 두려움을 갖는 나약함에 대해서도 문제를 제기한다. 변화와 개혁은 이런 나약함을 떨쳐낼 때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