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통상압력 공세가 날이 갈수록 거세지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목표가 표면적으로 드러난 한·미FTA 개정 협상으로만 그치지 않을 기세다. 미국의 전방위적 공세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다. 하지만 정부는 최대의 통상 위기에 몰렸는데도 적절한 대응책조차 찾지 못하고 속수무책이어서 안타깝다.
추석연휴가 한창이던 지난 4일 한·미FTA 개정 협상을 시작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워싱턴D.C.에서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과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만난 2타 공동위 특별회기 결과였다. 다음날인 5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는 한국산 세탁기 수입으로 자국 산업이 피해를 입었다는 판정을 내렸다. 삼성전자, LG전자 세탁기에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발동을 예고하기도 했다.
미국 ITC는 오는 19일 자국 세탁기 산업에 대한 세이프가드 발동을 위한 공청회를 갖은 뒤 12월께 트럼프 대통령에게 구제조치안을 보고할 예정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후 60일 이내 최종 구제안을 확정해 발표하게 된다. 삼성과 LG가 미국에 수출하는 세탁기 매출은 연간 1조원 규모다. ITC는 지난달에는 한국과 중국 등 지역에서 수입하는 태양광 전지 및 패널이 자국 산업에 심각한 피해를 입혔다고 판정했다. 이 역시 세이프가드 규제를 내놓기 위한 사전 심사 절차다. 한국 기업들의 태양광 전지·패널 수출 규모는 연간 1조4000억원에 이른다.
정부는 11일 미국의 세이프가드 발동 가능성에 대응하기 위해 전자업계 관계자들과 대책회의를 열기로 했지만 업계에서는 정부의 뒷북 대응에 불만이 높아지고 있다.
업계가 강한 불만을 표시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집요하고 치밀한 계획아래 통상 압력을 높이고 있을 때 정부는 그저 ‘엄포’ 정도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번 한·미FTA 개정 협상의 과정을 되짚어보면 보다 정부의 안이한 태도는 뚜렷해진다. 미국은 8월22일 서울에서 열린 1차 한·미FTA 공동위 특별회기에서 농산물 관세 철폐 등 구체적인 요구사항까지 내걸면서 조속한 개정을 주장했지만 정부는 이런 미국의 요구를 거부하면서 마치 대단한 치적인양 발표했다. 당시 김현종 본부장은 미국에서 조속한 개정을 제안했지만 이에 동의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당당하게 임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다렸다는 듯이 열흘 뒤 한·미FTA 폐기를 참모들에게 지시했다. 언론은 트럼프 대통령이 서울 1차 공동위 결과에 매우 불만이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결국 지난 4일 2차 공동위 특별회기에서 개정협상을 개시하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통상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전략을 바꿔 산업계 피해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개정이 이뤄지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 제조업체들이 보호무역을 앞세운 트럼프 정부가 들어선 이후 해외 경쟁기업에 대한 제재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고 이런 요구를 받은 미 행정부는 자국 업체에 지나치게 유리한 방향으로 통상압력을 가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서는 정부의 미숙한 초기대응이 트럼프 대통령의 ‘미치광이 전략’을 사용하는 계기가 됐다고 비난한다.
지금 겉으로 내놓는 입장보다 중요한 것은 통상위기를 극복할 기본전략을 마련하는 것이다. 이미 시작된 통상위기를 최소의 피해로 막고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묘수를 찾아야 한다. 정부와 통상당국이 지금 해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