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이 없는 나눔이 있는 사회로
탐욕이 없는 나눔이 있는 사회로
  • 정 종 암
  • 승인 2013.04.25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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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양은 아름답다. 선(宣)한 부자의 삶도 아름답기 그지없다. 그러나 노욕(老慾)에 찬 천(賤)한 부자, 즉 졸부(猝富. mushroom)의 삶이 구역질을 안기는 사회의 한 단면이 씁쓸할 때가 많다. 삼라만상 천지신명은 인간에게 억만 겁 속 찰나적인 순간만을 살게끔 태어나게 할 뿐, 영원한 삶을 부여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생이란 이슬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누구나 아케론(Acheron) 강이나 삼도천(三途川)을 향해 손을 맞잡고 건널 때 고작 뱃삯 몇 푼을 건네면 되는 게 우리네 삶이다. 이 땅에 오는 것도 동지요. 또한 찰나를 살다가 저 세상을 함께 가기에 우리들 삶은 다들 동지들이다.
그러나 황혼녘인 삶까지도 탐욕에 찬 나머지 이 사회와 이웃을 보듬지 못하는 행태는 추하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죄악 중에 탐욕보다 더 큰 죄악이 없다”고 했다. 그런데 통상적으로 생의 끝자락에 서면 지나침이 없어야 함에도 그르치기도 한다. 조선조 시인이자 비평가(평론가)이며 정치가였던 ‘허균’은 그의 누이 ‘허난설헌’의 죽음에 이렇게 읊었었다.
“-상략- 홀연히 왔다가 홀연히 떠나니/ 오랜 세월 머물지 못했어라// 구름 가득 덮인 광릉의 무덤길이여/ 밝은 해도 가리웠으니 죽음의 집이어라// 빽빽하게 둘러싸인 숲 속 어둑한 곳이여/ 그대의 혼은 흩날리면서 어느 곳으로 가시는지 -하략-”
그렇다. 대체적으로 천 년을 살 것처럼 끝남을 망각한 채 산다. 찰나의 삶에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면서 말이다. 재물은커녕 이름조차 남기지 못하는 천한 부자들의 삶을 본다. 조선조 허균의 형제는 물욕이 없어도 한 세상 밥 먹고 살면서 여느 군상과는 달리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역사상 졸부는 이름도 남기지 못했다.
천한 부자들은 골프장에서 드라이브샷을 날리다가 공이 소나무에 맞아 튕겨 나오면 골프채를 탓하며 용품은 바꾸어도 어려운 지인이나 이웃에 베푸는 게 없다. 그러면서 이들은 세속적인 부만 돈(錢)인 줄 알고, 필자같이 창작을 하는 정신적 가치인 지적재산권에 대해서는 돈으로 환산하지 않으려는 무식함을 드러낸다. 이러한 이의 생색내기 한 끼 밥이나 그 술은 쓰다. 한 끼 잘 먹으려고 아귀다툼하지 않는 맑은 영혼들이 눈살을 찌푸리기에 이들은 끝내 ‘졸부증후군(Sudden Wealth Syndrome)’을 앓기도 한다. 자신의 부가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다. 국가와 이 사회의 구성원이 음으로, 양으로 일조했단 사실이다.
그러기에 굴곡진 삶에도 아낌없는 1%의 나눔이나 말년에 자신을 다스려 전 재산을 나누거나 환원하는 선한 부자가 아름답고 존경스럽다. 이러한 사회적 기여에도 힘을 쏟는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을 졸부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덕을 이 사회에 부여하거나 환원하기에 찬사를 보낸다. 그러기에 현세는 물론 후세에 이름을 남긴다. 반면 황혼녘의 탐욕으로 인생말년을 망치기도 한다. 이에 허균이 살았던 400년 후를 사는 현세의 필자도 언젠가 이렇게 읊었었다. ‘노욕과 졸부들의 행태’를 보고 버리는 삶이겠다고.
“-상략- 여태까지의 삶에 탐욕이 있었거든/ 다 버리는 자세로/ 이 사회와 후진들을 위해// 내 곳간을 풀고는/ 인색한 삶의 추태를 보이지 않으며/ 항상 경청하는 자세를 가지고/ 알량한 부와 지식은 이 사회를 위해 던지면서// -중략- 노욕과 늙은이의 추태를 없애는/ 넉넉한 품성으로/ 삶의 진한 황혼녘 잿빛이 돼/ 책 한 권만을 남긴 채/ 잔치 속 아름다운 이별이고 싶다.”
이렇게 형상화한 비평가인 필자 또한 이 땅을 살다 갈 세속의 동지임은 뛰어넘을 수 없다. 자신의 위치와 그 능력이 자신만의 몫이란 사고를 버리는 자세가 고귀하기에 아름답다. 티끌만큼이라도 베푸는 자세로, 삶의 동지들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자. 우리들의 삶이 끝나는 날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