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이여! 벚꽃 없는 계절이라면
4월이여! 벚꽃 없는 계절이라면
  • 정 종 암
  • 승인 2013.04.1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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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S. 엘리어트가 그의 시에서 4월을 ‘잔인한 계절’이라고 노래했다.

설사 잔인하지 않더라도 4월을 빨리 보내고 싶다.

꽃샘추위를 물리친 벚꽃이 끝내 한반도를 뒤덮었다.

만개한 벚꽃 아래 광란의 질주를 벌이는 이 계절을 맞이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꽃의 아름다움은 둘째치고라도 ‘벚꽃 축제’란 미명 아래 취해있음이 구역질을 안긴다.

대한민국 서울의 4월은 일본국 동경을 옮긴 듯이 ‘여의도 벚꽃 축제’에 취해 있다.

벚꽃으로 둘러싸인 국회의사당과 그 주변은 변절과 배신을 일삼는 정치 사기꾼들의 아방궁인 ‘사꾸라 하우스 타운’인지 분간이 안된다.

국회 정문 좌우로 벚꽃이 열병식을 하는 양 도열해 있으며, 윤중로에 벚꽃 축제만 있고, 무궁화 축제는 없다.

도리어 일본에서는 우리가 광분하는 벚꽃 축제에 감사함을 전하는 무궁화 축제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산해경’에서는 “군자의 나라(우리나라)에 훈화초(무궁화)가 있어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고 했다.

옛 부터 우리나라를 ‘근역’ 또는 ‘근화향’이라 불렀으며, 무궁화가 많이 서식한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 때 최치원이 왕명으로 작성해 당에 보낸 국서에는 “근화향은 겸양하고 자중하지만 호시국은 강폭함이 날로 더해간다”고 했고, 구당서(737년) 신라전 기사에도 신라가 보낸 국서에 “그 나라를 일컬어 근화향, 곧 무궁화의 나라라고 했다”고 기록한다.

고래로 중국인들은 우리나라를 ‘군자의 품격을 갖춘 나라, 무궁화가 아름답게 피는 나라’라 예찬했건만 찬밥 신세는 그칠 줄 모른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와서도 스스로 ‘근역’, ‘근화향’이라 해 구한말부터 국화(國花)가 됐다.

그것도 외국과는 달리 국가나 일개인이 정한 게 아니라 국민 대다수에 의해 정해졌단 사실이다.

국권이 상실되던 해 애국지사 황현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절명시’를 남겼고, 김좌진 장군은 “삼천리 무궁화 땅에 왜놈이 웬일인가”라고 부르짖으며 조국광복을 애타게 기다렸다.

여인들은 삼천리 지도 위에 8도를 상징하는 여덟 송이 무궁화를 수놓으며 광복의 그 날까지 민족정신을 이어 갔다.

남궁억은 전 강토에 민족정신의 상징인 무궁화 묘목을 심어 삼천리 무궁화동산을 일구는 운동을 펼쳐 홍천에서 가꿔 해마다 수십만 그루씩 각 지방의 학교, 교회, 사회단체는 물론 가정에 보급했다.

겨레의 얼을 지키고, 질긴 역사의 믿음과 전망을 확산하려 함이었다.

일제는 그러한 행동이 민족정신을 고취하는 반일적 사상의 발로라 해, 1933년 이른바 ‘무궁화사건’이란 이름으로 체포해 옥고를 치르게 했다.

태극기와 함께 무궁화를 우리 민족과 멀리 떼어놓기 위한 흉계를 꾸몄다.

서구에서는 ‘사론의 장미’라 할 정도로 ‘꽃 중의 꽃’이라고 칭송하는 우리의 국화가 냉대 받는다.

어찌해 대한민국 정치의 중심이자 민의의 전당에 벚꽃이 난무해도 아무런 거리낌도 없을까. 일제 침탈 36년에 대한 향수인가. 무지의 극치인가. 축제도 축제 나름이고, 꽃도 꽃 나름이다.

그 많은 꽃 중에서도 유독 ‘벚꽃 축제’란 이름으로 환호하는 우리들의 이중성이 아이러니하다.

일제는 무궁화를 심지 못하게 했고, 심어진 무궁화도 다 캐내 벚나무를 심게 했단 사실을 아는가. 이제라도 전국에 산재해 있는 벚나무를 다 잘라 다른 용도를 사용하는 방법이 좋지 않냐. 위정자들은 보라. 백성의 꽃이자 국화인 무궁화의 역사와 그 꽃이 어디에 있으며, 그 축제라도 있는지 아는가. 21세기 세계질서 속 동반자로 함께 가야 할 일본임에도 36년의 침탈도 모자라 그 야욕은 끝이 없다.

배알도 없는가. 벚꽃의 유희만은 없애자. 행여나 용서는 하더라도 그 행위까지 잊을 수 없으며, 이제는 그들의 국화로 상징되는 벚꽃 아래에서 너울너울 춤추는 것을 멈춰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