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 속 마을 ‘솜리’를 아십니까
갈대 속 마을 ‘솜리’를 아십니까
  • 신아일보
  • 승인 2007.07.26 1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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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은 전라북도 서북단에 위치하여 노령산맥인 천호산과 미륵산의 동부에 준험한 산세를 이루고 있고, 서북부에 함라산 줄기가 서부로 향하는 구릉과 대하천으로 비옥한 평원을 이루고 있으며 북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충남과 서로는 옥구평야에 남으로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평야에 접하고 있다.
익산시내는 늪지 였다. 솜리가 이리로 변했다는 역사는 익산시민이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솜리의 유래는 알지 못하는 이가 많다. 솜리는 삼국 백제때 모현동 배산남쪽 소력지현(所力只懸)의 터는 만경강 조수(潮水)구간의 늪지인 ‘갈대 속 마을’이란 뜻으로 솝니(솜리)라 했다.
이 속터의 의미를 한자로 옮겨 이리(裡里) 라 불렀다한다.
본디 익산의 중심지는 금마면 왕궁면 이였다. 마한국(馬韓國) 터전으로 금마저(金馬渚) 라 했다가 고려 충혜왕때 익주(益州)로, 조선 태종때 익산(益山)이 됐다.
익산은 백제궁터로 추정되는 왕궁성을 비롯하여 외성역할을 한 오금산성과 미륵산성 저토성 국립사찰격인 미륵사지 왕실기원사찰인 제석사지등 삼국시대 도성에서나 찾아볼수 있는 유적이 남아있다.
시내에서 동쪽으로 720번도로를 따라 금마면 기양리 소재 미륵산 (430m)과 당대 국내 최대석탑인 미륵사지 (국보11호, 사적150호) 석탑과 당간지주(보물236호)가 있으며, 용화산 (342m) 남쪽 등성이 왕궁리 유적(사적408호)에는 국보289호인 왕궁5층석탑이 있다.
1989년부터 본격발굴을 시작한 미륵사지와 왕궁리터는 백제무왕 (600-641년) 때에 조성된 궁성으로 확인 되는 등 왕궁사와 대관사 명문기와 등 3천여점의 방대한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삼국유사> 무왕조에 전하는 서동설화는 금마면 서도고리 연동마을을 배경으로 마룡지(馬龍池)연못도 남아있다.
이렇듯 익산과 금마는 마한과 백제의 왕궁및 별궁으로 수많은 유적과 보물등이 살아 숨쉬며, 조상들의 얼과 혼이 담겨져 있는 역사적 유적지 이다.
이러한 훌룡한 조상들의 혼과 얼 문화가 담긴 익산 금마, 왕궁, 여산에 근무하게 됨을 무한한 영광과 감사로 생각하며, 단지 순찰의 계념을 넘어 “역사를 지킨다” 라는 소명의식(召命意識)으로 우리문화재와 더불어 역사를 지키는 경찰관으로서 길이길이 남아주길 필자는 갈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