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미국 반도체 지원법’ 뒤에 숨은 함정과 복병
[기고] ‘미국 반도체 지원법’ 뒤에 숨은 함정과 복병
  • 신아일보
  • 승인 2023.03.06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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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종 작가·칼럼니스트
 

미국 상무부가 지난 2월 28일(현지 시각) 발표한 '반도체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의 세부 지원 조건을 보면 당혹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자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나서며 막대한 보조금을 내건 미국이 지원 조건을 갈수록 까다롭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차라리 「반도체 지원법」이 아니라 오히려 「반도체 패권법」이라고 할 만큼 무리한 독소 조항투성이여서 한국 반도체 업계에 빨간불이 켜지며 폭풍을 일으키고 있다. 도저히 수용하기 어려운 조항이 너무 많아 기업들이 전전긍긍(戰戰兢兢)하며 고심이 깊어지고 긴 한숨과 함께 우려의 목소리만 커가고 있다. 

미국 상무부는 이날 520억 달러(약 64조 3,000억 원) 규모의 반도체 생산 지원금 신청 절차를 안내하면서 ▷경제 및 국가안보, ▷사업 상업성, ▷재무 건전성, ▷기술 준비성, ▷인력개발, ▷사회공헌 등 6개 심사 기준을 제시했다. 전체를 관통하는 목표는 경제와 국가안보에 대한 기여이다. 미국은 국방부를 비롯한 미국 정부 기관이나 주요 시설에 필요한 반도체를 얼마나 생산하고, 얼마나 안정적으로 공급할지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또 최첨단 반도체에 대한 국방부와 국가안보 기관의 접근, 중국 등 우려국과 공동 연구 또는 기술 라이선스를 하는 경우 지원금 전액 반환, 국가안보 프로그램과의 통합 용도로 이용할 수 있는 반도체 시설 제공 등의 조건을 내걸었다. 하나 같이 외국인 투자 기업이 아니라 자국 국방 관련 국유 기업에 적용될 만한 내용이다.

그런데 이번 반도체 보조금 지급 기준이 국내외로부터 거센 반발을 사고 있다. 한국 대만 등 동맹국은 물론이고 미국 현지 언론까지 부작용을 지적하며 일제히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설을 통해 “기업에 법에도 없는 진보(Progressive) 정책을 강요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미국이 반도체 설계부터 제조까지 아우르는 ‘반도체 패권국’ 부활을 꿈꾸며 내놓은 야심작이 첫발부터 삐걱거리는 형국이다. 이런 상황은 바이든 대통령이 자초한 바나 다름없다. 이번 기준이 산업정책인지, 외교정책인지, 복지정책인지, 대선 공약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게 미국 경제 전문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의 평가다. 또한 고객·장비·원료 등 영업기밀 공개 등과 함께 10년간 대중 투자 금지 조건을 준수해야 하고 노조가 정한 대로 임금을 지급하고, 작업 규칙을 만들고, 어린이 보육 시설을 설치해야 하는 등 만만찮은 부담까지 지게 된다. 대중국 견제라는 외교정책 목표와 내년 대선을 겨냥한 노동·복지 정책까지 몰아넣은 ‘프랑스식 좌파 정책’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비판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도 “바이든 행정부가 보조금을 통해 기업의 행동 방식을 바꾸고 있다.”라면서 “미국에 대한 투자는 이미 높은 비용과 관리상의 어려움에 대한 우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라고 꼬집었다.

실제 앞으로는 미국 정부로부터 지원금을 받는 기업들은 수익성 지표와 재무계획 등 내부 자료를 제출하고 연구·생산 시설까지 공개해야 한다. 

특히, 1억 5,000만 달러(약 2,000억 원) 이상 지원을 받은 반도체 기업은 전망치보다 실제 수익이 많으면 초과 이익을 미국 정부와 공유해야 한다. 배당과 자사주 매입에는 보조금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미국의 국방·안보 분야에 반도체를 우선 공급해야 하고, 생산과 연구 시설을 공개하는 기업을 우선 지원한다는 내용도 포함됐다. 미국이 보조금 지원을 빌미로 보안이 필수인 반도체 핵심 공정과 경영 기밀까지 모두 공개하라고 압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보조금을 받으면 중국 등에 10년간 신규 투자를 할 수 없다는 ‘가드레일(Guardrail:안전장치)’ 조항까지 예고된 상황에서 투자 득실 계산이 복잡해졌다. 아무리 미국 납세자의 세금을 투입하는 정책이라지만 상식을 벗어난 지나친 ‘시장개입’이고 그대로 수용하기 어려운 과도한 ‘경영 간섭’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당연히 한국 반도체 기업들도 크게 당황하고 있다. 미국 반도체 지원법 뒤에 숨은 함정과 복병이 해도 해도 너무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산업에선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자동차 산업에서는 현대자동차그룹이 미국의 자국 중심 산업 생태계 조성에 막대한 로비 자금을 쏟아부으며 적극적으로 대응했지만, 미국은 ‘자국 이익 중심’ 기조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한국의 반도체 기업에서는 미국 정부의 보조금이 혜택이 아니라 오히려 족쇄가 될 상황이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보조금 규정에는 향후 10년간 중국 등에 신규 투자를 할 수 없다는 ‘가드레일(Guardrail:안전장치)’ 조항은 큰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의 40%, SK하이닉스는 D램의 절반 가까이 각각 중국에서 생산하는 만큼 그 파장을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중국 사업을 접을 수도, 그렇다고 미국이 구축하는 반도체 공급망에서 이탈할 수도 없는 K-반도체는 그야말로 고립무원(孤立無援)에 빠진 사면초가(四面楚歌)의 최악상황(最惡狀況)에 내몰렸다.

더구나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MAGA)” 만들겠다는 ‘조 바이든(Joe Biden)’ 정부의 자국 이기주의는 극에 달하고 있다. ‘조 바이든(Joe Biden)’도 결국 ‘점잖은 도널드 트럼프(Dignified Donald Trump)’일 뿐이다. 미국 중심의 반도체 공급망 참여는 한국으로선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다. 반도체 지식재산권과 생산 장비 공급망을 장악하고 있는 미국의 손을 놓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반도체 수출의 40%를 차지하는 중국과 등을 질 수도 없는 진퇴유곡(進退維谷)에 빠진 진퇴양난(進退兩難)의 극한상황(極限狀況)이다. 미국 정부의 보조금도, 중국 시장도 모두 필요한 한국으로서는 종합적이고 전략적인 판단이 절실히 요구되는 이유다. 이는 개별 기업의 노력에만 맡겨 둘 수 없는 일이다. 반도체 산업은 이미 민간을 넘어 국가 안보의 핵심 영역으로 자리 잡았다. 중국과 패권 다툼을 벌이는 미국이 한국·미국·일본·대만이 참여하는 이른바 ‘칩4(Chip4 │ Fab4) 동맹’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당연히 정부가 나서서 외교력을 발휘해야만 한다. 한국이 미국에 꼭 필요한 반도체와 배터리 등 첨단 제조기술을 가진 핵심 동맹국이라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어필해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더욱이 한국은 미국 내 일자리 창출에 큰 기여가 있었다. 한국이 지난해 대미 최대 투자국이자 올해 미국에서 ‘리쇼어링(Reshoring │ 해외 생산시설 본국 회귀)’과 외국기업 ‘직접투자(FDI : Foreign Direct Investment)’ 덕에 일자리가 35만 개나 새로 늘어났는데, 국가별 기여도에서 한국이 1위를 차지했다고 지난해 8월 20일(현지 시각)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보도했다. 실제로 지난해 34개 한국 기업이 미국에 생산 설비를 옮기거나 새로 지어 미국에만 일자리 3만 5,403개 창출에 공여한 뼈아픈 실적이 있다. 또한 지난해 7월 27일(현지 시각) ‘조 바이든(Joe Biden)’ 대통령과 화상 면담에서 “SK그룹이 220억 달러 규모의 투자를 추가로 단행하는 경우 미국 내 일자리는 2025년까지 4,000개에서 2만 개까지 늘어날 것”이라고 답하는 등 최근 한국 기업들이 미국에 대규모로 투자해 일자리 창출에 크게 공여한 데 미국 대통령도 거듭 감사를 표시했다. 

그런 핵심 동맹국에 대한 차별적 조치는 의당 재고돼야 마땅하다. 더구나 올해는 한·미 동맹 70주년이다. 특히 외교부는 지난 2월 15일 “역사적인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을 내실화하겠다.”라며,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포함해 전방위적 한·미동맹 강화를 위한 토대를 구축하겠다.”라고 밝혔다. 특히 “우리 경제를 살리고 국민이 안심할 수 있는 ‘행동하는 동맹’을 구현하겠다.”라며 미국과의 “전략·안보·경제·기술 등 분야별 고위급 전략적 소통·공조도 더욱 강화해 나갈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통해 보조금 조건의 예외를 인정하고 반도체 중국 수출 제한 유예 기간을 연장하는 등의 약속을 기필코 받아내야만 한다. 

반도체 지원을 빌미로 기업 영업기밀까지 공개하라는 미국이다. 소재부터 장비까지 아우르는 반도체 생태계를 미국으로 흡수하겠다는 목표를 노골화한 것이다. 필요하다면 일본 대만 등 동맹국과 공조를 통해 함께 목소리를 높이는 방법도 적극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지난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The Inflation Reduction Act)」 제정으로 한국 기업이 보조금 차별을 당할 때처럼 뒷북 대응을 되풀이해선 절대로 안 된다. 미국에 협력할 것은 협력하되, 무리한 요구에 대해서는 압박도 하며, 적극적으로 선제 대응해서 한국과 미국이 서로 호혜적(互惠的)인 상생(上牲)으로 ‘윈윈(Win-Win)’하는 해법을 도출해 내야만 한다.

/박근종 작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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