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아니 에르노 장편소설 ‘그들의 말 혹은 침묵’
[신간] 아니 에르노 장편소설 ‘그들의 말 혹은 침묵’
  • 권나연 기자
  • 승인 2022.02.16 1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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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민음사)
(사진=민음사)

프랑스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 아니 에르노의 초기 장편 소설 ‘그들의 말 혹은 침묵’이 출간됐다.

16일 출판사 민음사에 따르면 ‘그들의 말 혹은 침묵’은 아니 에르노의 두 번째 장편 소설로, 작가의 초기작 중에서도 가장 실험적인 글쓰기와 문체를 선보인 독특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문학적 관심사와 주제 의식은 데뷔작 ‘빈 옷장’, 세 번째 장편 소설 ‘얼어붙은 여자’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에르노는 ‘그들의 말 혹은 침묵’에서도 여지없이 ‘여성’과 ‘노동자 계급 출신’이라는 자신의 조건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즉 문학을 통해 이 두 가지 지위(계급과 성)가 사회적 규범 속에서 어떠한 역학 관계를 가지고 표리부동하게 작동하는지를 잔인할 정도로, ‘사회학적 자기 성찰’이자 ‘문학적 사회 과학’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신랄하게 들여다본다.

‘그들의 말 혹은 침묵’은 사회적 성공의 첫 단추라고 할 수 있는 명문 고등학교에 진학한 주인공 ‘안’이 작문 과제를 받으면서 시작한다.

항상 글을 쓰고 싶어 함에도 노동자 계급의 부모로부터 아무런 언어(이른바 문학적이고 교양적이며 학식 있는 언어)를 물려받지 못한 주인공은 자신이 뿌리박혀 있는 조건(경험)과 고등 교육 기관의 담론 사이에서 비틀거린다.

‘안’은 가까스로 지난 여름 방학의 기억을 길어 올린다. 부르주아와 엘리트를 경멸하는 듯 굴다가도 정작 그들에게 벌벌 떨며 동경하고 숭배하는, 노동자 계급의 삶을 딸에게 결코 대물림할 수 없다면서 발악하는 주인공의 부모는 매일같이 ‘안’을 닦달하고, 혹시나 (계급의 사다리 위에서) 삐끗할까 봐 노심초사한다.

하지만 이미 부모의 품, 그들의 언어와 사유로부터 놓여나기 시작한 ‘안’은 부모의 모순적 태도에서 연민과 염증을 느낀다. 그러던 중 성에 눈을 뜬 화자는 그동안 철저히 금지되어 있던, 그래서 더욱 간절한 자기만의 ‘쾌락’을 거머쥐고자 매 순간 골몰한다.

어느 날 ‘안’은 동네 근처의 방학 캠프에서 강사로 근무하는 대학생 무리와 어울리게 되고, 마침내 오래도록 고대해 온 성 경험을 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그들(남성들)은 계급 투쟁, 소외, 해방 등 온갖 이론을 설파하며 자유연애와 육욕을 긍정하면서도 막상 ‘안(여성)’에게는 이중 잣대를 들이대고, 일종의 물건처럼 취급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이제 ‘안’의 눈앞에는 작문 과제를 적어야 할 종이 한 장이 놓여 있고, 기억 저편으로는 지난여름의 메아리가 진동하고 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 같은 작품을 갈망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마는 ‘안’의 손끝, 텅 빈 백지 위에는 자신의 출신과 고등 교육 사이의 불화, 성을 둘러싼 모순과 차별만이 떠돌 뿐이다.

한편 저자 아니 에르노 1940년 9월 1일, 프랑스 릴본에서 태어나 노르망디 이브토에서 성장했다. 1974년 자전적 소설 ‘빈 옷장’으로 등단해, ‘남자의 자리’(1984)로 르노도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2008년, 현대 프랑스의 변천을 조망한 『세월(Les Années)』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 프랑스어상, 텔레그람 독자상을 받았고, 2019년 맨부커 국제 문학상 후보에 지명됐다.

kny0621@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