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시대상에 가려진 또 다른 국가대표
[데스크 칼럼] 시대상에 가려진 또 다른 국가대표
  • 나원재 산업부장
  • 승인 2021.07.27 12: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32회 도쿄올림픽이 17일간의 대장정을 시작했지만, 올림픽 특수를 노린 기업 마케팅은 지난 시간과 사뭇 다르다. 이번 도쿄올림픽은 코로나19 팬데믹(세계 대유행)에 개막 전까지 불안했고, 이후 지금까지도 현지에선 올림픽 관계자들의 코로나19 확진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까닭에 기업들은 현지 마케팅은커녕, 비대면 마케팅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엎친 데 덮쳐 한‧일 관계마저 역사 갈등에 감정이 격해지고 있다. 욱일기가 현지 우리 선수촌에 등장하는가 하면, 일본의 끊임없는 독도 영유권 주장은 분쟁을 야기하며 넓은 틀에서 ‘화합’이란 올림픽정신을 훼손하고 있다.

기업으로선 올림픽 마케팅은 ‘잘해도 본전’이란 소리가 나온다. 그렇다고 우리마저 올림픽정신을 위배하는 ‘노 재팬(NO JAPAN)’을 외치며 애국마케팅을 펼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재일한국기업으로선 더욱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재일한국기업은 과거 선진국의 문물을 일찍이 받아들인 일본에서 경영‧금융기법 등을 습득해 고국에 전파하며 국가 발전에 상당히 공헌했지만, 현시대에선 한‧일 관계가 악화될 때마다 국적논란을 이유로 불매운동의 타깃이 되고 있다.

대표적인 재일한국기업으로는 롯데가 꼽힌다.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은 1921년 10월 경남 울산에서 5남5녀 중 맏이로 태어나 일제강점기인 1942년 부관연락선을 타고 무일푼으로 일본에 건너간 1세대 재일한국기업인이다. 그는 신문팔이, 우유배달 등의 일을 하면서 와세다 대학에 진학했고, 허물어진 군수공장에서 비누를 만드는 사업과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면서 선풍적으로 인기를 끈 껌 사업에 뛰어들어 돈을 모았다.

이후 고 신 명예회장은 한‧일국교정상화를 계기로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했고 한국 투자를 본격화했다. 애초 고 신 명예회장은 기간산업에 투자해 경제발전에 이바지하겠다는 뜻을 품고 제철사업을 추진했지만, 국영화 방침이 정해지면서 희망을 접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1979년 호남석유화학(현 롯데케미칼)을 인수하며 중화학기업 추진의 꿈을 이뤘다. 고 신 명예회장은 이후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잠실 롯데월드 단지개발에 나섰다. 듣기론 당시 그는 국민에게 적절한 문화휴식 공간, 세계적인 랜드마크를 짓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바통을 이어 받은 차남 신동빈 회장은 아버지의 가르침에 더해 미국, 영국 등에서 글로벌 비즈니스 경험을 쌓고 1990년 호남석유화학에 입사해 2004년 그룹 컨트롤타워인 정책본부장을 맡았다. 신 회장도 이후 40건 이상 국내외 인수합병, IPO(기업공개) 확대, 글로벌 진출 등 사업 확장을 주도하며 세계 속 롯데의 위상을 끌어올렸다.

신 회장이 그룹 경영에 참여한 후 롯데는 2005년부터 2020년까지 연평균 8.9%의 성장률을 기록했고, 2020년 그룹 자산은 118조원으로, 2000년 대비 605.5% 성장해 국내 재계순위 5위에 올랐다.

롯데는 명목상 한‧일 통합경영을 이어왔지만 실제 사업 확장과 글로벌 진출 등은 모두 한국 롯데가 도맡았다. 일각에선 롯데가 한국서 벌어들인 돈을 일본으로 가져간다고 지적하지만 실제 롯데가 일본서 가져온 사업자금은 현재 가치로 수십조원에 달한다.

롯데는 과거 기업의 태생부터 현재까지 눈부신 성장을 이끌며 정체성을 지켜왔지만, 달라진 시대상은 동일한 하나를 둘로 나눠볼 수 있게 만들었다. 이분법적인 시각이 아닐 수 없다.

같은 맥락으로 재일한국기업에 대한 인식을 되짚어봐야 한다. 그릇된 일에는 반드시 질타가 필요하지만, 우리는 시대상에 가려진 또 다른 국가대표들을 외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master@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