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칼럼] 한국 연극사 연구의 개척자인 노정 김재철의 생애와 업적
[기고 칼럼] 한국 연극사 연구의 개척자인 노정 김재철의 생애와 업적
  • 신아일보
  • 승인 2020.07.30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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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노정(蘆汀) 김재철(金在喆)은 순종 1년인 1907년 8월27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무릉리 250번지 안동김씨 가문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괴산공립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조선문학과를 졸업하고 평양사범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1년 만인 1933년 1월27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화동(花洞) 자택에서 폐병으로 서거했다.

그는 8~9세 무렵에 창작한 한시가 전해져 올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난 신동(神童)이었고, 시와 희곡을 창작하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멋진 청년 예술가였다.

그는 영민하고 유머가 있고 술과 여자를 좋아하고 인정이 많고 사교적이어서 김태준, 이희승, 이숭녕, 윤태림 등 따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특히 그는 진보적 성향의 인사로 사회주의자인 김태준과 친했고 사회비판 의식이 강해 문학 작품과 학술 논문과 저서를 발표할 때마다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피할 수가 없었다.  

그는 명이 짧아 26세를 일기로 단명했지만, 천재(天才)로 학문에 대한 열정이 대단해 한국 연극사, 꼭두각시, 탈춤 연구의 개척자로 활약했다. 특히 그는 최초로 ‘조선연극사'를 저술함으로써 한국 연극사 연구의 선구적 업적을 남겨 높이 평가받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연극사'외에도 민요, 시, 소설, 김삿갓 등의 연구를 묶어 출간한 ‘노정잡고(蘆汀雜稿)'가 있다. 논문으로는 ‘구개음화에 대해', ‘조선어화(朝鮮語話)의 조선어', '외사(外使)와 조선연극', '조선인형극 꼭두각시'가 있다.

한편 그는 1931년에 김태준과 함께 조선어문학회 창립을 주도하고 사비로 ‘조선어문학회보'를 발간해 장르 사에 기반을 둔 국문학의 구성 체계를 확립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조선어문학회에 가입해 활동하면서 오직 우리 문화의 재건만을 위해 문화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문학, 연극, 언어학을 넘나들며 공부하고 민족주의적 연구를 강조하면서 저술활동을 해 한국 국문학 연구의 개척자가 됐다. 그러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연구 대상이 극문학이라는 주변 장르라는 점 때문에 세상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최근 들어 국문학계에 희곡 연구가 활발해지며 지난 2002년에 김재철의 호를 딴 ‘노정 문학상’이 제정되는 등 그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김재철의 생애와 업적에서 좀 안타깝고 아쉬운 것은 술과 여자를 너무 좋아하고 과로하다 보니 폐병에 걸려 26세를 일기로 단명했고, 여러 편의 희곡도 창작했으나 전하는 작품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추모사업회가 조직되지 않아 그의 고향인 괴산에서도 이미 잊힌 인물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그의 고향인 무릉리(武陵里)는 안동김씨 안렴사공파 집성촌으로 35가구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들이 거의 다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바람에 한 집만 남아 있다고 한다. 그리고 노정 김재철의 생가는 20여 년 전에 이미 철거돼 이제는 그의 흔적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고 한다.

'괴산군지(槐山郡誌)'와 ‘괴산인물지(槐山人物志)'에는 그의 출생지가 충북 괴산군 청안(淸安)으로 기록돼 있는데, 필자의 조사연구 결과 그의 출생지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무릉리 250번지로 밝혀졌다. 그래서 앞으로 ‘괴산군지'와 ‘괴산인물지'를 수정 보완할 때에 노정 김재철의 출생지를 청안이 아니라 청천(靑川)으로 기록해야 한다. 그리고 ‘청천면지(靑川面誌)' 인물편에는 노정 김재철이 누락돼 있어 아쉬운데, 앞으로 ‘청천면지'를 수정보완 할 때에 노정 김재철을 새로 첨가해 기록해야 한다. 

/신상구 충청문화역사연구소장・국학박사

master@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