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개봉된 영화 ‘남한산성’을 관람한 적이 있다. 영화는 1636년 발생한 병자호란을 다루었다. 청나라가 침략하자 척화만을 주장했던 대신들과 이를 받아들인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신했고, 청나라는 남한산성을 포위한 채 항복을 요구했다. 식량부족, 추위, 풍전등화의 위기에도 영화에 등장한 조정 대신들은 화(和)·전(戰) 양론 입씨름을 지속적으로 벌였다. 화친 논의를 배척하고 대의를 지키자는 척화파, 대화를 통해 실리를 찾아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후일을 도모하자는 주화파로 나뉘어 팽팽히 맞선 것이다.
영화가 끝난 후 주연배우들과 감독이 예고 없이 인사차 들어왔다. 헌데 관객들은 반응이 의외였다. 환호성이 예상됐는데 그러지 않았다. 영화 내내 느꼈던 답답함이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1600년대 대결 양상이 지금도 정치 영역과 사회 곳곳에서 벌여지는 모습과 교차되면서 먹먹했기 때문일 것이다.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인간을 동물과 구별 짓는 핵심 요소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하루가 멀다 하고 막말을 쏟아내고 몸싸움까지 벌이면서 ‘동물국회’라는 용어까지 탄생시켰다. 언어는 한 사회의 품격, 공유된 가치, 규범들을 모두 내포하고 있는데, 일부 정치인들의 언어는 이를 철저히 배격하고 있다.
정치인들의 언어는 언론에 의해 문자화돼 기록되고, 사회구성원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되고 오랜 동안 역사에 기록된다. 현대 정치는 언론미디어의 정치라 할 정도로, 언론이 정치인의 행위와 사회구성원들간 연결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사회구성원들은 언론이 전달해주는 정치 내용을 접하고 이를 실제 정치 현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언론이 정치인들의 막말과 몸싸움에 집중하거나, 자극적인 언어표현에 너무 집중하게 되면, 사회구성원들은 이를 실제 정치 현실로 받아들인다.
정치인의 막말은 언론의 주목을 받아 자신에 대한 인지도를 올리고, 정파적 지지층의 결집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혐오는 기본이고, 사회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고, 이를 제어할 수 없는 사회 전반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진다.
또한 막말에 대한 허용 태도가 상승해 막말이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막말 사회’가 된다.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인 막말은 처음에 사람들에게 민감 반응을 일으켜, 이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불러 일으킨다.
하지만 반복적으로 듣게 되면 사람들은 막말에 무뎌지고 둔감해진다. 반응 강도도 낮아지고 막말을 허용하는 태도가 올라간다. 결과적으로 막말에 대한 사회적 용인 수준을 높이고, 스스럼없이 상호간에 막말을 사용하는 빈도를 올려 막말의 일상화가 발생하게 된다.
막말의 일상화는 더 심각한 막말의 생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전의 막말에 둔감해지고, 그 ‘심각한’ 의미가 고갈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이전과 같은 반응강도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더 강한 막말을 ‘개발’ 할 것이다. 그래야 언론의 주목, 지지층의 결집을 유도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약물중독의 내성(tolerance)과 유사하다. 동일한 막말의 반복적 사용은 사람들에게 내성을 가져오고, 이전과 동일한 효과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더 강한 막말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언어를 통해 사회 갈등을 축소하고 통합에 이르게 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행위이다. 언론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사회가 갈등과 분노의 위기 사회로 치닫고 있다. 정치와 언론이 한국 사회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는 책임을 수행해주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