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한국사회의 보수주의자들은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저 휴전선 이북을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테러집단이나 심지어는 깡패집단이라는 용어까지 사용했다.
북한은 늘 남한인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통일하려는 전쟁집단으로 생각했고, 북한 노동당 규약에도 여전히 그 문구가 살아있음을 그 근거로 삼아왔다. 그런 연유로 수차례 개정된 헌법에도 우리 영토를 휴전선 이북이라 하지 않고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라 해 북한을 하나의 국가가 아닌 일종의 반국가 단체쯤으로 규정한 것이다.
반면에 진보주의자들은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자고 은연중에 주장해왔다. 그들이 북한을 국가로 인정하자는 논거는 특별한 것이 없기 때문에, 기껏해야 1948년 UN에서 인정한 유일한 합법정부는 대한민국이라는 문구를 교과서에서 삭제시키는 정도였다. 그래서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친북이니 종북이니 하는 공격의 빌미를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공식이 깨졌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선언과 부속합의인 군사분야 합의서를 확정하는 과정에서 지금까지의 공식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보수를 자처하는 자유한국당이 평양선언과 군사분야 합의서는 국회의 비준동의가 필수적이라 하면서 위헌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국회의 비준이라 함은 사실상 국가 간 조약을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이 경우 북한이 하나의 국가라는 전제가 깔려 있는 인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자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이 즉각 성명을 통해 북한은 국가가 아니기 때문에 국회 비준이 필요 없다고 맞받았다.
이를 지켜보는 국민들은 갑자기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다. 누구 말이 맞는 걸까?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북한은 과연 국가인지 아닌지를 말이다.
사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해방이후 우리는 줄곧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 통례였다. 그래서 현행 헌법도 북한을 우리의 영토로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흐름은 이미 그러한 조항을 실체적 조항이 아닌 상징적 조항으로 해석하도록 만들었다.
그 첫 번째 단초는 지난 1991년 노태우 정부 시절 남북한이 동시에 UN에 가입을 한 사실이다. 물론 우리에게는 1948년 UN에서 인정하는 한반도 내 유일한 합법정부는 대한민국이라는 정통성이 있었지만, 남북 동시 가입을 받아들인 순간 우리 정부도 북한이 하나의 국가라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그 이후에도 보수와 진보를 떠나 역대 모든 정권에서는 기회가 있을 때 마다 남북정상회담을 제의했고, 실제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이 열린 바 있다. 그렇게 쌓인 결과가 바로 문재인 정부에서 추진한 판문점 회담과 평양 정상회담이다. 만일 북한이 하나의 국가가 아니라면 감히 정상회담이라는 용어를 쓸 수 없었을 것이며, 종전선언이니 평화체제 구축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북한은 언젠가는 하나의 민족국가로 통일이 돼야 하는 당위성을 지닌 대상인 것만큼은 사실이다. 굳이 북한이 국가인가 아닌가가 통일의 대상인지 아닌지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 과거 고구려·신라·백제도 각각 독립된 국가였지만 하나의 민족이기 때문에 통일이 된 것이 아니겠는가?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해야 모든 남북문제를 절차적 정당성을 통해 풀어나갈 수 있다. 이제 우리도 현실을 인정하고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할 때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