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차정 의사 64주기 추모제
박차정 의사 64주기 추모제
  • 신아일보
  • 승인 2008.05.26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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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보훈청, 오늘 금정구문화회관 광장서
박차정 의사 기념사업회는 부산지역보훈관계자 및 동래여고 학생 1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부산출신 여성 독립운동가 박차정 의사의 순국 64주기를 맞아 27일 오전11시 부산금정구 문화회관 만남의 광장에서 추모제를 개최한다.
이날 추모제는 강대민 경성대 교수의 사회로 오정석 기념사업회 이사장과 안중현 부산보훈청장의 추모사에 이어 동래여고 합창단의 추모의 노래, 헌화 및 분향의 순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박차정 의사는 부산일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북경으로 망명, 김원봉과 결혼 후 의열단 단원으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에 앞장서다 1939년 2월 강소성 곤륜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부상을 당했다.
그 후 부상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5월 27일 중경에서 서거했으며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유관순 열사와 동격인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박차정 의사는 고향이 부산으로 1924년 5월 조선소년동맹(朝鮮少年同盟) 동래지부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동래(東萊) 일신(日新)여학교에 재학 중 조선청년동맹 동래지부 집행위원장인 숙부 박일형의 권유로 조선청년동맹 및 근우회(槿友會) 동래지부 회원, 동래노동조합 조합원, 신간회 동래지회 회원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전개 했었다.
그는 1929년 3월 일신학교를 졸업한 뒤 동년 7월 서울 수운회관(水雲會館)에서 개최된 근우회 제2회 전국대회에 동래지부 대의원 자격으로 참석하여 근우회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다 동년 9월에는 조사연구부장·상무위원·선전 및 출판부장 등의 직책을 맡아 여성들의 민족운동 활성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 후 1930년 1월 부산방직 파업사건을 주도하다가 동래에서 피체된 그녀는 소위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으나 병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1930년 2월 중국 북경으로 망명한 그녀는 1931년 의열단장 김원봉을 만나 결혼하고 의열단 단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해 왔다.
1932년 의열단이 한중연합 항일투쟁의 일환으로 장개석(蔣介石)의 도움을 받아 남경에 위치한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中國中央陸軍軍官學校) 교외에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朝鮮革命軍事政治幹部學校)를 설립하자 제1기 여자부 교관으로 선정되어 사관생도 양성을 담당하였다. 1935년 6월에는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 부녀부(婦女部) 주임, 1936년 7월에는 이청천(李靑天)의 처 이성실(李聖實)과 함께 민족혁명당원 가족들을 규합할 목적으로 남경조선부인회를 조직하여 일선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민족의식을 고취·단합시켰다.
그는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가 창설되자 조선의용대 부녀복무단(婦女服務團)을 조직하고 단장으로 선임되어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다가 1939년 2월 강소성 곤륜산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던 중 부상을 당해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1944년 5월 27일 중경에서 서거했다. 광복이후 그녀의 유해는 경남 밀양 감천동 뒷산에 안장되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부산/김삼태기자 stkim@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