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불법체류 방지인가 현대판 노예제인가
[기자수첩] 불법체류 방지인가 현대판 노예제인가
  • 박고은 기자
  • 승인 2017.09.10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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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장 이동을 허락해주거나 휴가를 낼 테니 네팔에 가서 치료받을 수 있게만 해 달라"

궂은일과 극심한 스트레스로 건강이 악화된 A씨는 이러한 의사를 밝혔지만 고용주는 둘 다 거절했고, 나흘 뒤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지난달 한 자동차 부품제조회사 공장 기숙사 옥상에서 숨진 채 발견된 네팔 이주노동자의 이야기다. 결혼 직후 돈을 벌어 오겠다며 한국으로 온 지 1년 4개월 만에 그는 세상과 작별을 고했다.

올여름에만 네팔 이주 노동자 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른 나라 출신의 경우 통계조차 집계되지 않는다.

이처럼 최근 이주노동자들의 자살이 잇따르자 이주노동자 자살급증원인 실태조사와 직장 이동을 제한하는 '고용허가제'에 대한 전면 재검토 요구도 거세지고 있다.

2004년 8월부터 시행된 '고용허가제'는 사업자의 외국인 인력 고용을 허가하고 관리하는 제도다. 불법 체류, 인권 유린 등 산업연수생 제도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마련됐다.

고용주가 필요한 외국인 인력을 신청하면 정부가 취업비자를 받아 입국하는 외국인을 연결해주는데, 대부분 이들이 취업하는 곳은 영세 제조업이나 농축산업, 어업이고 노동환경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한 경우가 부지기수다.

가장 큰 문제는 고용주가 고용허가를 받아 채용을 하고 나면 근로자는 그다음부터는 대부분이 꼼짝없이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한다. 직장을 자유롭게 옮기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외적인 경우 세 차례까지 회사를 옮길 수 있지만 휴업이나 폐업에 따른 고용허가의 취소, 고용주의 근로조건 위반 등 사업장 이동 허용 조건이 매우 까다롭다. 거의 노예와 같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사용자의 근로조건 위반과 부당한 대우 등 사업주 책임이 명확하다면 성실근로자제도의 대상이 될 수 있는데 이주노동자들이 이를 증명하기엔 의사소통 문제 등 걸림돌이 많은 실정이다.

의사소통의 문제와 이직 절차가 까다롭다는 점 때문인지 일부 사업장에서는 이를 악용해 이주노동자에 대한 강제 노동, 퇴직금 미지급, 차별 등 노동 착취가 군림한다.

이 같은 상황에 사업장을 무단으로 이탈했다가 불법체류자 신세가 돼 오도 가도 못한 외국인들이 단속을 피하다 사고를 당하거나 스스로 자살을 택하는 것이다.

모든 자살을 고용허가제와 연관 지을 수는 없지만, 이주노동자를 사용자에게 전적으로 종속시켜 놓은 현 제도의 반인권성과 열악한 노동환경 등을 감안한다면 고용허가제가 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부인할 수는 없어 보인다.

도입 취지와 달리 고용허가제를 악용해 외국인 노동자들의 인권과 생명을 위협하는 사례가 만연하다 보니 이제는 제도 자체가 오히려 착오가 된 셈이다.

물론, 현실적으로 구인난에 허덕이는 사업장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의 부도덕한 이탈을 막고 고용관리를 효율화하기 위한 방도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인종과 국적의 차별 요소가 분명하고, 인권과 생명을 위태롭게 하는 법제도를 그대로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주노동자들의 열악한 지위를 보호할 법적·제도적 개선대책을 서둘러 마련되길 바란다.

[신아일보] 박고은 기자 goeun_p@shinailb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