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초 유골 열여섯 구'는 어떻게 한 곳에 묻혔나
'속초 유골 열여섯 구'는 어떻게 한 곳에 묻혔나
  • 이중성 기자
  • 승인 2017.07.0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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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묘지, 해일 피해자, 6·25전쟁 등 3가지 추측
▲ 29일 주차장 공사 중 유골 6구가 발견된 속초시 영랑동 현지에서 국방부 6·25 전사자 유해발굴 감식단 장병들이 전사자 유해 여부를 가리기 위한 유품 찾기 작업을 벌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달 29일 오전 10시 15분께 속초시 영랑동의 한 횟집 주차장 조성 공사장에서 굴착기로 땅을 파던 중 유골 다섯 구가 발견됐다.

이에 이틀간 주차장 터를 모두 파보자 유골은 총 열여섯 구가 발견됐다.

그러자 일각에선 6·25 전쟁 관련자 유골로 추정된다는 목소리가 나왔고, 국방부 6·25 전사자 유해발굴감식단 감식을 실시했으나 관계없다는 분석이 나왔다.

감식단은 이장 흔적, 다양한 연령대, 유류품 미발견 등의 이유로 전사자 유해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대체 유골 열여섯 구는 어떻게 한 곳에 묻히게 된 걸까. 이를 두고 감식단과 주민들, 지역 문화기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크게 세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 주차장이 원래는 '공동묘지'였다

먼저 대표적인 추측으로 공동묘지 설이 있다. 주민들은 유골이 발견된 일대가 해안가와 밀접한 구릉 지형으로 예전에 공동묘지로 쓰였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유골 발견 지역 인근에 있는 초등학교는 원래 묘지였다가 일제강점기에 학교를 지으면서 묘를 이장했다. 따라서 이번에 발견한 유골도 그와 비슷한 사례라는 추측이다.

경찰과 군 감식단들 역시 뼈가 뒤섞여 나온 것으로 미루어 어딘가에 묻혀 있던 뼈를 한 곳에 옮겨다 묻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속초문화원에도 1953년 3월 31일 북한 공군의 속초항 기습으로 북쪽 단천이 고향인 5명이 부두하역 작업 중 사망했고, 이들을 영랑호변에 안장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1953년부터 30여 년간 공동묘지로 운영했다는 기록도 남아있어, 확인된 정황들로 봤을 때 공동묘지 설은 현재까지 가장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꼽힌다.

◇ '해일'로 숨진 주민들이다

두 번째 추측은 1960년대 해일이 일어나 숨진 주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1968년 10월 24일 속초에 엄청난 폭풍과 해일이 동해안을 강타해 속초에서만 150여 채의 가옥 침수, 이재민 5900여명 발생, 어민 33명이 사망 또는 실종됐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발생한 해일로 인해 장사동에 이재민 등 500여 가구가 집단이주하면서 '속초 새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기도 했다.

◇ '6·25전쟁'과 관련이 있다

마지막 세 번째는 그래도 '6·25전쟁'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발견 당시 현장에서는 인근 '모래기'라는 지역에서 예전에 주택을 짓던 중 엄청난 양의 유해를 발견한 적이 있다.

따라서 이를 모아 어딘가에 이장했는데 그곳이 바로 이번 발견 장소라는 해석이다.

하지만 영랑동 일대에 전투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어 설득력이 부족하다.

속초문화원 관계자는 "이전 자료와 대조해보고 있으나 자료만으로는 이번에 발견한 유골이 정확히 어떻게 묻혔는지 설명하긴 힘들다"며 "과학적 감식과 함께 결정적인 증언이나 증거자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여러 추측들이 나오고 있으나 정확한 증언이나 증거자료가 없는 관계로 경찰은 발견된 유골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내 감식절차를 거친 뒤 행정기관에 보내 무연고자로 처리할 것으로 보인다.

[신아일보] 이중성 기자 lee119c@naver.com